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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초, 그곳에선 잊었던 세월의 조각을 만납니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4.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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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조회수
1870
내용

창원 창동 선술집 '만초'에 남아있는 마산·마산인들의 추억을 찾아서

 

창원시 마산합포구 중성동, 아니 '마산 창동 골목'이라 하는 게 더 어울리겠다. 여기, 마산의 마지막 선술집이라 할 수 있는 '만초'가 자리하고 있다. 조남륭(79)·엄학자(73) 부부는 손님이 있든 없든 오늘도 문을 열어놓고 있다.

지금의 '만초'는 1970년대 '음악의 집'이라는 술집에서 시작됐다.

조남륭 사장은 6·25 때 부산으로 피란 왔다. 외할아버지·외할머니를 모시기 위해 의령에 갔다가 엄학자 씨를 만나 결혼했다. 어르신들이 돌아가시자 부부는 마산에 발붙였다.

1971년 북마산 문창교회 옆에서 '음악의 집'을 열었다. 탁자 한두 개에, 350원이면 흡족할 수 있는 막걸리·두부를 내놓는 정도였다. 좀 지나서는 생맥주도 팔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클래식을 틀어놓으니 문학가·음악가·미술가·대학생이 하나둘 발걸음 했다. 주머니 넉넉하지 못한 이들이 많다 보니 외상 쌓이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1973년 불종거리 옛 삼성약국 뒤로 옮기면서는 돈이 모이기는 했다. 종업원 몇을 두기까지 했다. 하지만 조 사장은 "돈 있어도 쓸데가 없다"며 퍼주기 바빴다. '음악의 집'을 찾는 이들 가운데는 서울로 대학 간 젊은이도 많았다. 이들 학비·차비는 말할 것도 없고 신고 있던 구두도 벗어줬다. 정 많은 엄학자 씨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미 문을 나선 사람을 뒤쫓아 가서 차비를 쥐여주는 건 엄 씨 몫이기도 했다.

 

그런데 건물 주인이 장사 잘 되는 걸 알고서는 가게를 비워달라 했다. 다시 옛 중앙극장 인근으로 옮겼지만 별 재미를 못 보자 아예 '음악의 집' 간판을 내렸다. 잠시 양화점을 하다가 1980년대 후반 지금 자리에 '만초'라는 실비집을 다시 열었다. 이름은 이전 주인이 쓰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이름 바꿔봐야 간판값이나 나갈 노릇으니 그편이 나았다. '만초'는 그렇게 25년 넘는 세월을 견디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만초, 그곳에선 잊었던 세월의 조각을 만납니다

창원 창동 선술집 '만초'에 남아있는 마산·마산인들의 추억을 찾아서

남석형 기자 nam@idomin.com 2014년 09월 05일 금요일

창원시 마산합포구 중성동, 아니 '마산 창동 골목'이라 하는 게 더 어울리겠다. 여기, 마산의 마지막 선술집이라 할 수 있는 '만초'가 자리하고 있다. 조남륭(79)·엄학자(73) 부부는 손님이 있든 없든 오늘도 문을 열어놓고 있다.

지금의 '만초'는 1970년대 '음악의 집'이라는 술집에서 시작됐다.

조남륭 사장은 6·25 때 부산으로 피란 왔다. 외할아버지·외할머니를 모시기 위해 의령에 갔다가 엄학자 씨를 만나 결혼했다. 어르신들이 돌아가시자 부부는 마산에 발붙였다.

1971년 북마산 문창교회 옆에서 '음악의 집'을 열었다. 탁자 한두 개에, 350원이면 흡족할 수 있는 막걸리·두부를 내놓는 정도였다. 좀 지나서는 생맥주도 팔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클래식을 틀어놓으니 문학가·음악가·미술가·대학생이 하나둘 발걸음 했다. 주머니 넉넉하지 못한 이들이 많다 보니 외상 쌓이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1973년 불종거리 옛 삼성약국 뒤로 옮기면서는 돈이 모이기는 했다. 종업원 몇을 두기까지 했다. 하지만 조 사장은 "돈 있어도 쓸데가 없다"며 퍼주기 바빴다. '음악의 집'을 찾는 이들 가운데는 서울로 대학 간 젊은이도 많았다. 이들 학비·차비는 말할 것도 없고 신고 있던 구두도 벗어줬다. 정 많은 엄학자 씨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미 문을 나선 사람을 뒤쫓아 가서 차비를 쥐여주는 건 엄 씨 몫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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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산창동에서 만초를 꾸려가고 있는 조남륭·엄학자 부부. /권범철 기자

그런데 건물 주인이 장사 잘 되는 걸 알고서는 가게를 비워달라 했다. 다시 옛 중앙극장 인근으로 옮겼지만 별 재미를 못 보자 아예 '음악의 집' 간판을 내렸다. 잠시 양화점을 하다가 1980년대 후반 지금 자리에 '만초'라는 실비집을 다시 열었다. 이름은 이전 주인이 쓰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이름 바꿔봐야 간판값이나 나갈 노릇으니 그편이 나았다. '만초'는 그렇게 25년 넘는 세월을 견디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곳을 드나드는 문에는 '술과 소리가 있는'이라는 글이 적혀 있다. 여기에 한 가지 더하면 허전함이 없을 것 같다. 그것은 '기억'이다.

가게 한쪽 벽면에는 수많은 사진이 붙어 있다. 어림잡아도 200장은 넘는다. 이 지역에서 지낸 사람들이라면 낯익은 예술인·언론인 등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미 저 세상 사람도 많다. '만초'를 찾은 사람들은 이 사진들을 통해 잊힌 기억을 잠시 꺼내놓을 수 있다. 그 기억은 특정 사람에 대한 것이기도 하거니와 마산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조 사장 하는 일이 매사 그렇듯, 사진에 큰 의미가 부여된 건 아니다. "한번 붙여보면 괜찮겠다" 싶어 시작했을 따름이다.

한때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장, 또 어느 날 한 장씩 없어졌다. 그렇다고 누가 가져갔는지 굳이 알 필요도 없다. 조 사장은 지금도 작은 디지털카메라로 쉬이 잊힐 기억들을 꾹꾹 눌러 담는다. 사진 현상은 그날 바로 가능한 어느 대형마트 내 사진관에서 한다.

마산을 떠나 객지 생활하는 이들은 고향에 대한 여러 기억을 안고 있을 것이다. 사진 속 사람들에게는 음악의 집, 만초, 조 사장 부부가 그중 하나일 수도 있다. 옛 시간을 잊지 못하고, 수십 년 만에 불쑥불쑥 찾는 이도 있다. 해군 시절 주말마다 조 사장 부부를 찾았던 이성복(63) 시인도 그러하다.

 

이번 추석 명절에는 또 어떤 이들이 고향을 찾았다가 만초까지 발걸음 하게 될까. 조 사장 부부는 무덤덤한 척하면서도, 누구든 상관 없을 그들을 기다리는 눈치다.

조 사장은 벽면에 있는 사진 몇 장을 꺼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기억이 희미하다 싶으면 엄 씨가 어김없이 조목조목 보충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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