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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오늘 우리집 낭군은 일숙직에 들어가고 그 시간을 이용해 나머지 가족은 창원에 롯데백화점에 가서 쇼핑하고 외식하고 그 동안 우리딸 키워 주느라고 고생만 하신 우리 친정 엄머니(거의 맨날 하루에 한번 이상을 둘이 아웅다웅 싸우지만서도) 그래도 이장애인 딸내미 때문에 고생이 많으셨는데 이 겨울 뜨시고 아름답게 사시라고 외투하나 사 드렸다.
그런데 오다가 몇해전에 들렀던 대산 미술관에 들렀다. 그때 시골에 있는 집 가운데 미술관이 있는 것도 재미있고 그리고 이곳 밀양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여서 괜시리 서울에서 살때는 보지도 않을 것 같은 미술관. 전시관. 유물관. 박물관등 무엇하나 색다른 것만 있으면 깡그리 아이들에게 보여주려고 일부러 운전대를 돌리곤한다.
그런데 몇해전에 갔을땐 개구장이였고 그땐 딸 아이는 배속에 있을때여서 기억 못하겠지 했던 경험을 우리 아들이 용케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전에 유치원에서 미술관에 다녀왔는데 옛날에 엄마랑 같이 갔던 대산 미술관이라고 유치원 선생님에게 제가 엄마랑 왔었다고 신나게 자랑했었단다.
대산 미술관이라는 글자를 읽자 마자
엄마 우리 또 미술관 갈래?
너 기억하니?
엄마 옛날에 이곳으로 가다가 연잎으로 모자 만들고 우산 만들고 했잖아.
우와~ 너 그거 기억해?
응 엄마 그거 진짜 재미있었잖아. 그런데 이젠 없더라.
겨울이라서 없지 내년 여름 오면 또 있어. 그때 가면 연꽃도 있을걸
그런데 연잎은 왜 이쁜지 알아? 그것은 진흙에서도 이쁘게 꽃을 필 수 있기 때문이야.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대산 미술관에 가자 한적하다. 꼭 가정집을 방문하는 듯도 하고 고급스러운 집을 미술관으로 내어 놓은듯 하다. 그리고 누구나 방문할 수 있도록 대문은 오픈되어 있고 앞마당에는 잔디와 징검다리 돌이 있었다.
그전에 왔을때는 사람의 기척은 없는데 전시실이 오픈되어 있고 작업장인 것 같은 곳도 문이 열려져 있고 그리고 잔잔한 음악이 흘르고 있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때 내가 데리고 간 아이들은 넓은 잔디가 내 집인냥 그리고 이렇게 좋은 집을 언제 보았냐는 식으로 이리뛰고 저리뛰고 미술관에 소장된 작품들을 구경하는 손님이 아닌 장난감처럼 작품을 손으로 만저 확인하는 아이들이였다.그때 기억은 그 아이들이 작품에 손상을 입힐까봐 조마 조마했던 기억과 같이 갔던 아이들 중에서 오줌 마렵다고 화장실 찾았던 기억과 들어갈 곳 안 들어갈곳 즉 작업실 가서 아무거나 만져 보고 작품을 붙잡고 숨박꼭질해서 아줌마들이 뭔 작품감상. 미술관 관람 이런 식으로 생각했었다. 그리고 아주 어수선해서 대충 보고 아이들을 차에 태워 오기 바빴다.
그런데 그렇게 어수선하게 갔다왔던 그곳이 나의 기억으로는 꼭 시 한편을 감상하고 온집 같은 것이었고 그리고 주인이 어떤 분일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리고 흰수염도 상상하고, 어수선하고 까만수염과 더벅머리 간직한 고뇌에 찬 미술가를 상상하면서 그 후로도 그곳을 지나쳐 올 때마다 나 혼자 상상하면서 궁금해 하곤 했었다.그리고 왠지 멋진 분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우리 아이들과 할머니 나 그렇게 갔다. 그런데 우리 친정어머니는 조금은 분별력이 없으신 분이라서 이쁘면 취하고자 하는 경우가 있다. 마당에 있는 이쁜 열매(먹지못하고 관상용으로는 이쁨)를 언제 따서 주머니에 넣어 우리집에 걸어 놓으면 이쁘겠다고 따셨고, 그리고 미술관에 왜 가야 하는지로 모르시겠다는 듯 하시면서도 딸내미가 가는 곳에 어부지리로 따라오시면서도 혹시 뭐 볼거 없을까 하는 호기심을 조금 가지셨지만 역시나 이쁜것은 마당에 있는 나무열매였다는 듯이 그것을 주머니에 한가지 꺽어 담으셨다. 우리 딸내미는 몇년전의 우리 아들 버금가게 신이났고 그래도 우리 아들은 내가 제차 왔었다는 기쁨에 도치할 무렵 그 대산미술관의 주인님을 다시 만났다. 집에서 편하게 입으시던 옷으로 우리들이 오자 마자 전시관 문을 얼른 여시고 감상하도록 배려해 주시고 우리들이 떠나오는데 배웅까지 아끼시지 않으셨다.
창원전문대학교 교수님이라는데 사비를 털어 그곳에 미술관을 만드셨고 지금도 그분의 월급은 고스란히 대산미술관에 쓰시고 부인이 선생님이신데 그분의 월급으로 생활비를 하신단다. 그리고 그곳은 무료로 미술전시를 하고 싶은 미술학도나 작가들에게 언제든지 내어 주시다는 설명이 있으셨다. 그리고 인터넷에 자신이 왜 미술관을 운영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노라고 했다. 그래서 집에 와서 한가한 시간을 이용해서 홈페이지를 들어가 봤다.
한마디로 꿈을 버리지 않은 분이고 아름다움을 키워가는 분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우리아들은 그 분이 미술관을 어떻게 운영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게 되면서 자신이 누군가를 만났다는 기쁨에 아직은 어린 마음에도 제차 확인하곤 한다.
엄마 다시 그곳에 가자
응 그래
내년에 연잎있을때 가고 엄마가 대산미술관 뒷편에 있는 모래섬에도 데려가 줄께.
그리고 아빠에게는 미술관 옆에서 낚시하자고 하면 되겠더라. 낙동강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아들아. 너도 그분처럼 어렵게 꿈을 키워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해라.
옛날에 미술을 하거나 문학을 하거나 하면 굶어 죽는다고 해서 멈춰야 했던 젊은이들이 많았거든
엄마도 그때 그 시절에는 정말로 그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젠 우리 나라에서도 아름다움을 글로 미술로. 그리고 마음으로 남길 수 있고 기억할 수 있는 세상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단다.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사람이 어렵다면 세상이 어려운 이 시점에 위로 받을 곳이 없어지거든 그래서 그분들이 필요한 것이란다.
그런데 그분은 그것을 실천하신다는구나 아들아.
교수님 우리 재룡이를 기억해 주세요. 꿈 많은 아이로 자랄 수 있도록....그리고 우리 재룡이 아빠랑 같은 창원대 나오셨네요.
그런데 오다가 몇해전에 들렀던 대산 미술관에 들렀다. 그때 시골에 있는 집 가운데 미술관이 있는 것도 재미있고 그리고 이곳 밀양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여서 괜시리 서울에서 살때는 보지도 않을 것 같은 미술관. 전시관. 유물관. 박물관등 무엇하나 색다른 것만 있으면 깡그리 아이들에게 보여주려고 일부러 운전대를 돌리곤한다.
그런데 몇해전에 갔을땐 개구장이였고 그땐 딸 아이는 배속에 있을때여서 기억 못하겠지 했던 경험을 우리 아들이 용케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전에 유치원에서 미술관에 다녀왔는데 옛날에 엄마랑 같이 갔던 대산 미술관이라고 유치원 선생님에게 제가 엄마랑 왔었다고 신나게 자랑했었단다.
대산 미술관이라는 글자를 읽자 마자
엄마 우리 또 미술관 갈래?
너 기억하니?
엄마 옛날에 이곳으로 가다가 연잎으로 모자 만들고 우산 만들고 했잖아.
우와~ 너 그거 기억해?
응 엄마 그거 진짜 재미있었잖아. 그런데 이젠 없더라.
겨울이라서 없지 내년 여름 오면 또 있어. 그때 가면 연꽃도 있을걸
그런데 연잎은 왜 이쁜지 알아? 그것은 진흙에서도 이쁘게 꽃을 필 수 있기 때문이야.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대산 미술관에 가자 한적하다. 꼭 가정집을 방문하는 듯도 하고 고급스러운 집을 미술관으로 내어 놓은듯 하다. 그리고 누구나 방문할 수 있도록 대문은 오픈되어 있고 앞마당에는 잔디와 징검다리 돌이 있었다.
그전에 왔을때는 사람의 기척은 없는데 전시실이 오픈되어 있고 작업장인 것 같은 곳도 문이 열려져 있고 그리고 잔잔한 음악이 흘르고 있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때 내가 데리고 간 아이들은 넓은 잔디가 내 집인냥 그리고 이렇게 좋은 집을 언제 보았냐는 식으로 이리뛰고 저리뛰고 미술관에 소장된 작품들을 구경하는 손님이 아닌 장난감처럼 작품을 손으로 만저 확인하는 아이들이였다.그때 기억은 그 아이들이 작품에 손상을 입힐까봐 조마 조마했던 기억과 같이 갔던 아이들 중에서 오줌 마렵다고 화장실 찾았던 기억과 들어갈 곳 안 들어갈곳 즉 작업실 가서 아무거나 만져 보고 작품을 붙잡고 숨박꼭질해서 아줌마들이 뭔 작품감상. 미술관 관람 이런 식으로 생각했었다. 그리고 아주 어수선해서 대충 보고 아이들을 차에 태워 오기 바빴다.
그런데 그렇게 어수선하게 갔다왔던 그곳이 나의 기억으로는 꼭 시 한편을 감상하고 온집 같은 것이었고 그리고 주인이 어떤 분일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리고 흰수염도 상상하고, 어수선하고 까만수염과 더벅머리 간직한 고뇌에 찬 미술가를 상상하면서 그 후로도 그곳을 지나쳐 올 때마다 나 혼자 상상하면서 궁금해 하곤 했었다.그리고 왠지 멋진 분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우리 아이들과 할머니 나 그렇게 갔다. 그런데 우리 친정어머니는 조금은 분별력이 없으신 분이라서 이쁘면 취하고자 하는 경우가 있다. 마당에 있는 이쁜 열매(먹지못하고 관상용으로는 이쁨)를 언제 따서 주머니에 넣어 우리집에 걸어 놓으면 이쁘겠다고 따셨고, 그리고 미술관에 왜 가야 하는지로 모르시겠다는 듯 하시면서도 딸내미가 가는 곳에 어부지리로 따라오시면서도 혹시 뭐 볼거 없을까 하는 호기심을 조금 가지셨지만 역시나 이쁜것은 마당에 있는 나무열매였다는 듯이 그것을 주머니에 한가지 꺽어 담으셨다. 우리 딸내미는 몇년전의 우리 아들 버금가게 신이났고 그래도 우리 아들은 내가 제차 왔었다는 기쁨에 도치할 무렵 그 대산미술관의 주인님을 다시 만났다. 집에서 편하게 입으시던 옷으로 우리들이 오자 마자 전시관 문을 얼른 여시고 감상하도록 배려해 주시고 우리들이 떠나오는데 배웅까지 아끼시지 않으셨다.
창원전문대학교 교수님이라는데 사비를 털어 그곳에 미술관을 만드셨고 지금도 그분의 월급은 고스란히 대산미술관에 쓰시고 부인이 선생님이신데 그분의 월급으로 생활비를 하신단다. 그리고 그곳은 무료로 미술전시를 하고 싶은 미술학도나 작가들에게 언제든지 내어 주시다는 설명이 있으셨다. 그리고 인터넷에 자신이 왜 미술관을 운영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노라고 했다. 그래서 집에 와서 한가한 시간을 이용해서 홈페이지를 들어가 봤다.
한마디로 꿈을 버리지 않은 분이고 아름다움을 키워가는 분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우리아들은 그 분이 미술관을 어떻게 운영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게 되면서 자신이 누군가를 만났다는 기쁨에 아직은 어린 마음에도 제차 확인하곤 한다.
엄마 다시 그곳에 가자
응 그래
내년에 연잎있을때 가고 엄마가 대산미술관 뒷편에 있는 모래섬에도 데려가 줄께.
그리고 아빠에게는 미술관 옆에서 낚시하자고 하면 되겠더라. 낙동강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아들아. 너도 그분처럼 어렵게 꿈을 키워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해라.
옛날에 미술을 하거나 문학을 하거나 하면 굶어 죽는다고 해서 멈춰야 했던 젊은이들이 많았거든
엄마도 그때 그 시절에는 정말로 그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젠 우리 나라에서도 아름다움을 글로 미술로. 그리고 마음으로 남길 수 있고 기억할 수 있는 세상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단다.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사람이 어렵다면 세상이 어려운 이 시점에 위로 받을 곳이 없어지거든 그래서 그분들이 필요한 것이란다.
그런데 그분은 그것을 실천하신다는구나 아들아.
교수님 우리 재룡이를 기억해 주세요. 꿈 많은 아이로 자랄 수 있도록....그리고 우리 재룡이 아빠랑 같은 창원대 나오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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