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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유미술 40인전 작가 대표 인사말
여러분 모두 반갑습니다.
우선 이곳 창원의 아름다운 전원 마을에 위치한 대산 미술관에서 저희 섬유미술가 40인의 전시회를 열수 있도록 주관해주신 김철수 관장님과 또한 지원금을 후원해주신 한국 문화예술 진흥원 관계자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리며 특히 오늘 토요일오후 모든 것을 뒤로하시고 격려와 미술 사랑으로 참석해주신 내빈 여러분에게 큰 감사를 드립니다.
일상적으로 우리주변의 전람회는 회화나 조각 등이 주류를 이루어 왔기 때문에 섬유미술 분야는 여러분에게 생소하게 느껴지실 것 같아 현대섬유미술의 생성과 개념에 관하여 간략하게 소개를 드릴까 합니다. 현대 섬유미술은 William Morris 의 Art & Craft 라고 하는 근대공예운동으로부터 태동된 염직미술이 Bauhaus 라고 하는 현대 디자인운동을 거쳐서 현대섬유 미술까지 변모 되어왔으며 건축 환경, 조경, 무대미술 등에서 섬유라는 재질이 갖는 유연성과 확장 가능성을 토대로 지금은 현대미술에 영향을 미치며 그 주류와 맥락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섬유미술에 사용되는 한올 한올의 섬유는 하나하나의 문자와도 같아서 작가는 그것으로서 낱말과 문장을 짜고 시와 산문을 짓는 것입니다. 한자 한자의 문자처럼 한올의 섬유는 개성을 지니고 있어서 그것들이 연속적으로 결합되면 무한의 형태로서 변형과 창조가 가능한 것이며, 바로 이러한 연출 가능성이 섬유미술가들에게는 창작의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뉴욕의 Central Park에서 열리고 있는 Javachef Christo의 약 20Km에 달하는 Central Park의 오솔길에 설치 전시되고 있는 “주홍깃발”은 현대 섬유미술의 역할과 가능성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이며, Sample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뉴욕시 당국은 6개월간 열리는 이 전람회의 관광수입의 부가가치를 1억8000만불로 잠정 추산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 작가의 개인전 하나가 세계 제1의 도시 뉴욕의 경제에 이러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것은 평소 예술을 사랑하고 예술가를 아끼는 뉴욕시민의 근본 잠재의식의 결과가 만들어낸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습니다.
이번 40인의 섬유미술전 참가 작가들은 이신자 예술원회원님을 비롯하여 한국 섬유미술의 견인차적 역할을 하신 중진 작가분들과 지금 자라나는 청년작가들로 구성된 우리 섬유미술의 현주소를 감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이제 저는 이 시점에서 고군분투하는 대산미술관장 김철수 교수에 관하여 간략히 언급하고 인사를 마치겠습니다. 1982년 11월 마산대학 졸업을 앞둔 김교수가 홍대 대학원 섬유미술과에 응시하겠다는 인사차 저의 작업실을 찾아왔습니다. 20대 중반인 김철수군의 표정은 사뭇 학구열에 대한 비장한 각오가 엿보였으며, 그 당시는 대학원 문이 너무 좁아 본교생들도 3수가 기본이라고 하던 시절 1차에 합격하여 재학시절엔 홍대 대학원 교내 수위분들이 제일 미워하는 학생으로 소문이 났었는데 이유는 실기실 개방시간을 늘 넘겨서 작업을 고집했기 때문에 생긴 그의 공부열심이 원인이었습니다. 그 후 1987년 창원전문대에 재직하고 1999년 대산미술관 개관소식을 알려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개관을 축하하기보다는 사립미술관운영이 얼마나 힘든 일인데 드디어 일을 저질렀구나 하고 깊은 우려가 앞섰습니다. 그것은 제가 96년부터 제자들의 작품발표장 겸 조그만 섬유미술관을 Open하면서 겪은 선험적 체험 때문이었습니다.
미술관 건축에서부터 시작되는 지역주민과의 마찰은 밑 빠진 독에 들어 붓는 순전히 소모성 운영자금의 고갈, 작년말 저의 집에 들렸던 일본의 무사시노 미술대학의 미술사 교수인 친구 박교수가 월말 저의 책상위에 수북히 쌓여있는 세금과 공과금 고지서를 보고 “너 이거 꼭 계속 해야하니?”라고 반문했겠습니까?. 사립미술관의 운영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당사자가 아니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곳 대산미술관도 물론 관장이 무급에다가 관리인이요, 정원사요 청소부가 되지 않고는 경제운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저는 잘 압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이고요. 그래도 그가 전공한 공부의 예술혼 Artist Spirit이 무엇인지?
정미소가 세워지면 가장 적합할 이곳의 농촌전원 마을에 미술관을 설립하여 고독하게 분투하고 있는 저의 제자이며, 저쪽 황원철 도립미술관장의 제자이기도 한 김관장에게 허용된 범위에서는 물론 허용되지 않는 것이라도 아이디어를 발휘하여 후원해 주시고 격려해주시어서 이곳 대산미술관이 불란서 Fontainebleau지역의 귀중한 관광자원인 Millet의 6평 Atelier처럼 창원의 작은 관광자원으로, 창원의 사랑하는 문화공간으로 훌륭하게 지속 발전될 수 있도록 지원과 격려해 주시기를 간청드리며 두서없는 인사에 대신합니다.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2005년 7월 9일
작가를 대표 하여
홍익대학교 미대 교수 송 번 수 배상
여러분 모두 반갑습니다.
우선 이곳 창원의 아름다운 전원 마을에 위치한 대산 미술관에서 저희 섬유미술가 40인의 전시회를 열수 있도록 주관해주신 김철수 관장님과 또한 지원금을 후원해주신 한국 문화예술 진흥원 관계자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리며 특히 오늘 토요일오후 모든 것을 뒤로하시고 격려와 미술 사랑으로 참석해주신 내빈 여러분에게 큰 감사를 드립니다.
일상적으로 우리주변의 전람회는 회화나 조각 등이 주류를 이루어 왔기 때문에 섬유미술 분야는 여러분에게 생소하게 느껴지실 것 같아 현대섬유미술의 생성과 개념에 관하여 간략하게 소개를 드릴까 합니다. 현대 섬유미술은 William Morris 의 Art & Craft 라고 하는 근대공예운동으로부터 태동된 염직미술이 Bauhaus 라고 하는 현대 디자인운동을 거쳐서 현대섬유 미술까지 변모 되어왔으며 건축 환경, 조경, 무대미술 등에서 섬유라는 재질이 갖는 유연성과 확장 가능성을 토대로 지금은 현대미술에 영향을 미치며 그 주류와 맥락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섬유미술에 사용되는 한올 한올의 섬유는 하나하나의 문자와도 같아서 작가는 그것으로서 낱말과 문장을 짜고 시와 산문을 짓는 것입니다. 한자 한자의 문자처럼 한올의 섬유는 개성을 지니고 있어서 그것들이 연속적으로 결합되면 무한의 형태로서 변형과 창조가 가능한 것이며, 바로 이러한 연출 가능성이 섬유미술가들에게는 창작의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뉴욕의 Central Park에서 열리고 있는 Javachef Christo의 약 20Km에 달하는 Central Park의 오솔길에 설치 전시되고 있는 “주홍깃발”은 현대 섬유미술의 역할과 가능성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이며, Sample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뉴욕시 당국은 6개월간 열리는 이 전람회의 관광수입의 부가가치를 1억8000만불로 잠정 추산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 작가의 개인전 하나가 세계 제1의 도시 뉴욕의 경제에 이러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것은 평소 예술을 사랑하고 예술가를 아끼는 뉴욕시민의 근본 잠재의식의 결과가 만들어낸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습니다.
이번 40인의 섬유미술전 참가 작가들은 이신자 예술원회원님을 비롯하여 한국 섬유미술의 견인차적 역할을 하신 중진 작가분들과 지금 자라나는 청년작가들로 구성된 우리 섬유미술의 현주소를 감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이제 저는 이 시점에서 고군분투하는 대산미술관장 김철수 교수에 관하여 간략히 언급하고 인사를 마치겠습니다. 1982년 11월 마산대학 졸업을 앞둔 김교수가 홍대 대학원 섬유미술과에 응시하겠다는 인사차 저의 작업실을 찾아왔습니다. 20대 중반인 김철수군의 표정은 사뭇 학구열에 대한 비장한 각오가 엿보였으며, 그 당시는 대학원 문이 너무 좁아 본교생들도 3수가 기본이라고 하던 시절 1차에 합격하여 재학시절엔 홍대 대학원 교내 수위분들이 제일 미워하는 학생으로 소문이 났었는데 이유는 실기실 개방시간을 늘 넘겨서 작업을 고집했기 때문에 생긴 그의 공부열심이 원인이었습니다. 그 후 1987년 창원전문대에 재직하고 1999년 대산미술관 개관소식을 알려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개관을 축하하기보다는 사립미술관운영이 얼마나 힘든 일인데 드디어 일을 저질렀구나 하고 깊은 우려가 앞섰습니다. 그것은 제가 96년부터 제자들의 작품발표장 겸 조그만 섬유미술관을 Open하면서 겪은 선험적 체험 때문이었습니다.
미술관 건축에서부터 시작되는 지역주민과의 마찰은 밑 빠진 독에 들어 붓는 순전히 소모성 운영자금의 고갈, 작년말 저의 집에 들렸던 일본의 무사시노 미술대학의 미술사 교수인 친구 박교수가 월말 저의 책상위에 수북히 쌓여있는 세금과 공과금 고지서를 보고 “너 이거 꼭 계속 해야하니?”라고 반문했겠습니까?. 사립미술관의 운영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당사자가 아니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곳 대산미술관도 물론 관장이 무급에다가 관리인이요, 정원사요 청소부가 되지 않고는 경제운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저는 잘 압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이고요. 그래도 그가 전공한 공부의 예술혼 Artist Spirit이 무엇인지?
정미소가 세워지면 가장 적합할 이곳의 농촌전원 마을에 미술관을 설립하여 고독하게 분투하고 있는 저의 제자이며, 저쪽 황원철 도립미술관장의 제자이기도 한 김관장에게 허용된 범위에서는 물론 허용되지 않는 것이라도 아이디어를 발휘하여 후원해 주시고 격려해주시어서 이곳 대산미술관이 불란서 Fontainebleau지역의 귀중한 관광자원인 Millet의 6평 Atelier처럼 창원의 작은 관광자원으로, 창원의 사랑하는 문화공간으로 훌륭하게 지속 발전될 수 있도록 지원과 격려해 주시기를 간청드리며 두서없는 인사에 대신합니다.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2005년 7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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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대학교 미대 교수 송 번 수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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