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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둥가둥가의 집은 미술관이래요

작성자
허중자
작성일
2007.11.23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2712
내용
열랑씨 글이 넘 감동적이라서 살짝 퍼 왔슴다. 근데,사진은 용량이 많아서 안올라가네요... 안도현 / 연탄한 장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들선들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을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듯이 연탄은, 일단 제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제가 좋아하는 시 중에 하나입니다. 이 시를 읽을 때 마다 꼭 떠오르는 분이 한 분 계신데요, 오늘은 그 분을 여러분께 소개 해 드리려고 합니다. 바로 저의 아버지세요. 1.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군가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저희 아버지는 9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나셨습니다. 지지리도 가난했던, 밥 한끼 챙겨먹기도 빠듯했던 그 시절. 아버지의 첫째 형님, 즉, 저의 큰아버지 께서는 홍대에서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이었다고 해요. 하지만, 그 시절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환쟁이”라고 부르며 천대 할 정도로 대우가 열악했습니다. 할아버지는 큰아버지의 미술도구를 거름더미에 던져버리며, ’이런 짓 할거같으면 집에서 나가라!’ 며 역정을 내셨죠. 결국, 집에서도 대우 못받고 사회에서도 가난한 예술가일 뿐이었던 큰아버 지는 매일 술만 드시다가 43세라는 젊은 나이에 결국 술병으로 생을 마감하시게 됩니다. 그 때, 저희 아버지 께서는 큰아버지 어깨너머로 배운 실력으로 경북예고에 진학해서 미술을 전공하려고 생각하고 계셨구요. 아무도 와주지 않는 큰아버지의 마지막 가시는 길. 큰아버지는 아버지의 손을 꼭 잡으며, “나는 이렇게 가난해서 아무것도 못하고 그냥 가지만, 너는 나중에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면 나같은 가난한 예술가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 주거라” 라고 유언을 남기셨대요. 유일한 유물인 낡디 낡은 작은 손목시계를 아버지 손에 꼭 쥐어 주시면서요. 세월이 흘러, 아버지께서는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셨고, 이제는 큰아버지의 유언을 실현할 때가 왔구나 라고 생각하셨습니다. <돌아가신 큰아버지의 사진> 2. 연탄은, 일단 제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제가 초등학교 5학년때,, 그러니까..약 10년 전의 일이네요. 일을 마치고 돌아오신 아버지께서는 불쑥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을 팔고, 시골에 작은 미술관을 만들고 싶다.” 위에 말씀드린 속사정을 알길 없는 저는 ‘집을 판다’는 소리에 울고 불고 떼를 쓰며 소리를 질렀죠. “싫어요! 아빠 혼자 하세요!” 그 때 만약, 아버지께서 큰아버지의 이야기를 해주셨다면, 저는 아버지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노력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이 속사정을 알게 된건, 불과3~4년 밖에 되지 않았어요. 가족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래 살던 아파트를 처분하고 시골에 있는 폐허 공장을 인수했습니다 다 부서진 유리창, 거미줄로 뒤덮인 이 공간에서 대체 어떻게 미술관을 만드냐며 회의의 눈길을 보냈죠. 저희 가족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알고 있는 주위의 모든 사람 조차도요. 미술관을 처음 오픈할 때부터 지금 까지 단 한번도 미술관 대관료를 받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전시회를 주최하는 작가의 팜플렛 비용, 오픈 행사 비용 까지 아버지께서 모두 부담하셨어요. “가난한 예술가들이 전시할 공간을 마련해 주거라”라는 마지막 큰아버지의 유언을 실천하기 위한 아버지의 힘든 도전이었습니다. <거미줄,먼지 뿐이던 폐허 공장 부지> 3.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저희 집은 재벌이 아니에요. 부모님 모두 월급 받으시는 평범한 공무원에 불과하십니다. 부모님의 버는 돈의 반은 전부 미술관 운영비로 쓰여지니, 큰 딸의 입장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나 많았죠. ’꼭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우리집이 재벌도 아닌데… 우리 먹고살기도 빠듯한데 왜 남을 위해 이렇게 해야하나…’라는 의문이 들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미술관에서 전시를 하는 작가들의 행복한 미소를 볼 때마다, 작은 시골 미술관이지만 꾸준히 방문해 주시는 분들을 볼 때마다 부모님께서는 큰 행복을 느끼신다고 합니다. <초창기, 소외된 농촌 주민을 위한 공연> 남을 위해 뜨거워 지는 삶, 연탄 같은 삶을 살고 계신 아버지,어머니 그리고 할머니까지. 너무나 소중한 저의 가족이랍니다. 폐허공장으로 시작한 ‘대산미술관’은 이제 아름다운 전시의 공간으로 탈바꿈 했습니다. 나무도 심고, 잔디도 가꾸고 관리를 해 나가면서, 이제는 오는 사람 마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에요!이런 곳에서 사셔서 정말 좋겠어요’ 라는 칭찬을 하는 아름다운 곳이죠. <현재 대산 미술관의 모습> <아버지> <중앙일보에도 한 차례 보도가 되었어요>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몸을 던져 추운 겨울날 미끄럽지 않은 길을 만드는 연탄처럼, 남을 위해 뜨겁게 자신의 몸을 태우고 있는 저희 부모님과 할머니, 때로는 힘든 날도 있겠지만, 당신들이 태우는 그 따뜻한 불빛은 세상 그 어떤 것 보다 아름답습니다.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군가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여러분은 단 한번이라도 남을 위해 뜨거운 적이 있었습니까? 기쁠 열, 맑고밝을 랑.
기쁘고 맑고 밝다는 뜻의 제 이름처럼,
항상 긍정적이고 밝게 살고있습니다^^
열심히 활동하겠습니다!. 김열랑,열랑,둥가둥가,아버지,열정,연탄,미술관,대산,대산미술관,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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