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준(사진) 화백이 돌이 갖는 영원성을 작품 속에 남기고 17일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31일까지 KNB 아트갤러리(경남은행 본점 1층)에서 열리는 전시는 생애 마지막 전시이자 유작전이 돼버렸다. 2010년 남정현 화백도 일곱 번째 개인전이 끝나기 하루 전에 세상을 떴다.
장 화백은 1930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났다. 1950년 6·25 전쟁에 참전해 1996년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다. 2001년 골수형성이상증후군에 걸려 죽기 전까지 병원과 집을 오가며 생활했다.
그는 병의 원인을 '피폭'으로 봤다. 미국의 일본 나가사키 원폭 투하 때 그는 나가사키에 있었다. 원폭투하 다음날 아버지를 찾아 피폭된 도시를 헤맸다. 장 화백은 원폭 피해자인 사실을 일본정부에 꾸준히 제기했고, 지난 6월 '이번이 마지막이다'라는 심정으로 부인과 함께 일본 재판정에 섰다. 아직 재판 결과는 감감무소식이다.
18일 진해 세광병원 장례식장에서 만난 장 화백의 부인 박춘선 씨는 손을 저으며 "안 될 것 같아…. 재판 결과 통보 예정일이 7월 17일이었지만, 아무 연락이 없어. 남편이 아프니, 그런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지"라고 말을 흐렸다.
장영준 화백은 그의 작품에 촘촘히 박힌 돌가루처럼 단단했고 고집스러웠다. 그는 기자를 만날 때마다 "그림을 아름답게 그려도 알맹이가 없으면 안 된다. '우리 것'이 담겨 있어야 한다", "팔기 위해 그림을 그리면 작품이 안 나온다. 진짜 열심히 하면 굳이 팔려고 나서지 않아도 행운은 절로 찾아온다. 춥고 배고프다고 타협해버리면 '형편없는 작가'라는 이야기를 듣기 십상이다"라고 줄곧 말해왔다.
장 화백은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 담벼락에 사금파리로 그리기도 했고, 6·25 직후에는 머큐로크롬이나 요오드팅크, 황토 등으로 그렸다. 붓이 없으면 신문지를 얇게 말아서, 물감 살 돈이 없으면 커피, 치자, 고추장 등으로 그렸다. 그러다가 '돌'에 눈을 뜨게 됐다.
그의 제자인 도소정 작가는 "선생님은 석채화(石彩畵) 기법을 창작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토속적인 무속신앙에서 모티브를 얻었고 운보 김기창 화백과 남농 허건 화백 등과 왕성한 활동을 나란히 해왔다. 부귀화(富貴花·모란꽃)를 많이 그렸는데, '제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10년을 피우지 못하며 때가 되면 반드시 시든다. 인생은 원래 공수래공수거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동서화랑 송인식 관장도 "작품에 대한 고집이 대단했던 분인데…"라며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