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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박물관은 살아있다] ⑪ 창녕박물관
우리 선조의 무덤 축조 지혜 엿보기
-경남도민일보-
창녕박물관은 1996년 교동고분군의 발굴로 그곳에서 나온 유물을 전시할 요량으로 개관된 고분박물관이다. 신석기시대에서 근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적과 유물을 가진 창녕의 모든 것을 전시하기에는 다소 협소한 공간인 듯하지만 앞으로 3배로 증축할 계획이며, 계성고분이전복원한 전시관에서는 미술전시도 접목하고 있어 제법 볼거리가 풍부하다. 또 교동고분군과 박물관을 둘러싼 산책길 역시 경치가 일품이다. 특히 교동고분군은 창녕읍에서 바라보면 다소 높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고분군에서 창녕읍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5분 정도면 고분군 산책길도 둘러볼 수 있다고 하니 꼭 거닐어 보는 수고를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스라이 보이는 송현동 고분군의 모습도 함께 감상하면서 말이다.
창녕박물관은 왼쪽으로 돌아들어 가는 입구가 시작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창녕의 주요 유적지를 표시해 놓은 현황판이 부착돼 있다. 앞쪽의 모니터를 보면서 램프에 들어오는 불빛을 보며 지형적으로 유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창녕을 둘러싼 길이가 60㎞에 달한다는 낙동강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낙동강은 고대인들에게 농사의 젖줄 역할을 했을 것이고 교역에 필요한 소중한 뱃길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2000년 이상 앞당기는 부곡면 비봉리의 신석기 유적을 비롯해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고인돌, 비화가야 혹은 비사벌의 논쟁이 따라다니는 4~7세기의 교동·송현동·계성·영상고분군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전국에서 7개 중 2개나 창녕에 남아있는 석빙고와, 국보인 창녕 신라진흥왕 척경비와 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도 지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창녕을 구석구석 둘러보고픈 이들이라면 이 현황판을 참고해보는 것도 좋겠다.
시대를 앞당긴 신석기 유적인 비봉리의 것은 아쉽게도 박물관에 전시된 것이 없다. 하지만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복제품이 위용을 자랑하며 전시실 초입을 장식한다.
장마면 뒷산에 실물이 있고 박물관에 전시된 고인돌은 복제품으로 실제는 30t의 무게를 자랑한다. 원래 장마면에는 7개 정도의 고인돌이 있었는데 일본강점기 때 길을 내면서 6개의 고인돌을 깨어서 자갈로 만들어 썼다고 한다.
우리가 허락한 적도 없는데 남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멋대로 가져가 쓰다니 독도 문제도 그렇고 일제의 비양심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닌 듯하다. 하나라도 남겨두었으니 고마워해야 하나 하는 허탈한 생각도 들지만 앞으로도 언급하게 될 일제의 우리 유산 파괴에 관한 이야기들은 기가 찰 노릇이다.
여기서 문득, 고인돌은 무슨 뜻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괸돌'이 어원이라고 하는데 받침돌 위에 거대한 돌을 얹어서 괸돌이라는 뜻이고 흔히 고인돌을 '지석묘'라고도 하는데 '지석'에서 '지'자 역시 지지할 지(支)자를 썼다고 하니 괸돌이 유래가 맞는 듯하다고 한다. 거대한 덮개돌에 비해 작은 석실이 인상적이다.
고분박물관이어서 그런지 고분의 축조 과정에 대한 설명이 꽤 자세하다. 무덤 양식에 대한 모형이 있는데 현대의 매장 양식과 비슷한 '구덩이나무널무덤'양식이다. 흙구덩이를 파서 바닥에 돌을 깔고 목관을 집어넣는 양식이다.
독무덤.
'독무덤'은 구덩이를 파고 돌로 네 개의 벽을 만들고 관 대신 항아리에 시신을 수습했다. 독 하나를 쓰는 외독무덤, 두 개의 독을 붙여서 쓰는 이음독이 있는데, 외독무덤은 주로 독을 세워서 매장했다고 한다. 뼈만 추린 세골장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시체를 세워서 넣기에는 불편함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독 중에는 2m가 넘는 대형 독도 있어 독을 복원하는 과정에 독 안으로 빠져 사다리를 가져다가 겨우 구출하는 에피소드도 있을 정도다.
굴식 돌방무덤.
'구덩식 돌덧널무덤'은 땅을 파서 네 면을 동시에 돌로 벽을 쌓은 후 관을 아래로 내려서 매장하는 방식이고 '굴식 돌방무덤'은 세 면을 먼저 쌓고 입구를 만들어 두었다가 시체와 부장품 등을 모두 무덤 속에 옮겨둔 후 입구를 막는 방식이다.
이들 무덤 양식은 시기를 구분 짓기보다는 신분에 따라 장법이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간편한 방식이었던 매장 방법은 일반인들이, 굴식 돌방무덤과 같이 공이 제법 들어가는 양식은 지배계급의 무덤 양식으로 추측된다.
구덩이 나무널무덤.
간단한 무덤 양식 옆에는 조상들의 무덤 축조 지혜를 엿볼 수 있는 교동 1호분 봉토 축조 및 구조 모형을 볼 수 있다. '무덤의 내부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를 한눈에 보여준다. 실제 크기가 1~3m에 이르는 뚜껑돌을 덮고 돌 위에 흙을 덮어 다졌다. 고분 중에는 지름이 20m였던 것에서부터 최대 68m에 이르는 것도 있었다. 68m면 낮은 산 하나 정도라고 하니 이 무덤을 축조할 수 있었던 이는 아마도 위세가 대단했던 것 같다.
무덤 축조 모형을 보면 까만 선으로 구획을 나눈 것이 보이는데 현대 학자들은 조상들이 무덤 설계도를 갖고 축조했던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팀별로 구획을 맡아 흙과 돌 등을 날라 무덤을 완성했는데 구획 별로 흙의 색깔과 재질이 달랐던 것에서 미루어 본 것이다. 이렇게 하면 흙의 재질이 섞여 무덤이 더욱 견고해지고 작업도 원활했을 것이니 무덤은 건축물이 남아있지 않은 시대의 건축술을 짐작할 수 있는데 건축기술의 집약이라고 보아도 좋겠다.
고분 축조 모형 옆에는 석실을 재현해 놓았다. 석벽 사이로 전시관을 두어 부장품들을 전시했다. 석벽을 통과하다 보면 무덤 속을 거니는 듯 강렬한 인상을 준다. 양옆의 전시실에는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말띠꾸미개를 비롯해 토기 등이 전시돼 있는데 무덤 속에서는 수많은 금·은 귀금속 제품이 쏟아져 나왔다. 금관도 출토되었지만 지금 우리에겐 없다. 1918~19년 일본이 발굴조사를 하면서 가져가 버렸다고 한다.
전시관 끝쪽에는 계성리 계남 북5호분 출토품이 전시돼 있는데 은제 허리띠와 세 잎 모양의 큰 칼이 인상적이다. 은제 허리띠는 우리가 지금 쓰는 체인이 달린 허리띠를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칼에 보이는 세 잎 모양은 말 장식품에도 나타나는데 아무래도 이 무덤 주인 부족의 상징인 것만 같다.
다소 작다 싶은 창녕박물관도 둘러보니 참말로 알차다. 일본인들도 어찌 알고 왔는지 창녕박물관까지 찾아와 5시간씩 보고 가는 정성을 아끼지 않는다고 하니 우리도 한 번 성심을 기울여 박물관 구석구석에 새겨진 의미를 되짚어볼 일이다.
△ 관람안내 = 운영시간 오전 9~오후 6시. 관람료 성인 500원·어린이 300원.
우리 선조의 무덤 축조 지혜 엿보기
-경남도민일보-
창녕박물관은 1996년 교동고분군의 발굴로 그곳에서 나온 유물을 전시할 요량으로 개관된 고분박물관이다. 신석기시대에서 근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적과 유물을 가진 창녕의 모든 것을 전시하기에는 다소 협소한 공간인 듯하지만 앞으로 3배로 증축할 계획이며, 계성고분이전복원한 전시관에서는 미술전시도 접목하고 있어 제법 볼거리가 풍부하다. 또 교동고분군과 박물관을 둘러싼 산책길 역시 경치가 일품이다. 특히 교동고분군은 창녕읍에서 바라보면 다소 높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고분군에서 창녕읍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5분 정도면 고분군 산책길도 둘러볼 수 있다고 하니 꼭 거닐어 보는 수고를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스라이 보이는 송현동 고분군의 모습도 함께 감상하면서 말이다.
창녕박물관은 왼쪽으로 돌아들어 가는 입구가 시작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창녕의 주요 유적지를 표시해 놓은 현황판이 부착돼 있다. 앞쪽의 모니터를 보면서 램프에 들어오는 불빛을 보며 지형적으로 유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창녕을 둘러싼 길이가 60㎞에 달한다는 낙동강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낙동강은 고대인들에게 농사의 젖줄 역할을 했을 것이고 교역에 필요한 소중한 뱃길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2000년 이상 앞당기는 부곡면 비봉리의 신석기 유적을 비롯해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고인돌, 비화가야 혹은 비사벌의 논쟁이 따라다니는 4~7세기의 교동·송현동·계성·영상고분군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전국에서 7개 중 2개나 창녕에 남아있는 석빙고와, 국보인 창녕 신라진흥왕 척경비와 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도 지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창녕을 구석구석 둘러보고픈 이들이라면 이 현황판을 참고해보는 것도 좋겠다.
시대를 앞당긴 신석기 유적인 비봉리의 것은 아쉽게도 박물관에 전시된 것이 없다. 하지만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복제품이 위용을 자랑하며 전시실 초입을 장식한다.
장마면 뒷산에 실물이 있고 박물관에 전시된 고인돌은 복제품으로 실제는 30t의 무게를 자랑한다. 원래 장마면에는 7개 정도의 고인돌이 있었는데 일본강점기 때 길을 내면서 6개의 고인돌을 깨어서 자갈로 만들어 썼다고 한다.
우리가 허락한 적도 없는데 남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멋대로 가져가 쓰다니 독도 문제도 그렇고 일제의 비양심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닌 듯하다. 하나라도 남겨두었으니 고마워해야 하나 하는 허탈한 생각도 들지만 앞으로도 언급하게 될 일제의 우리 유산 파괴에 관한 이야기들은 기가 찰 노릇이다.
여기서 문득, 고인돌은 무슨 뜻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괸돌'이 어원이라고 하는데 받침돌 위에 거대한 돌을 얹어서 괸돌이라는 뜻이고 흔히 고인돌을 '지석묘'라고도 하는데 '지석'에서 '지'자 역시 지지할 지(支)자를 썼다고 하니 괸돌이 유래가 맞는 듯하다고 한다. 거대한 덮개돌에 비해 작은 석실이 인상적이다.
고분박물관이어서 그런지 고분의 축조 과정에 대한 설명이 꽤 자세하다. 무덤 양식에 대한 모형이 있는데 현대의 매장 양식과 비슷한 '구덩이나무널무덤'양식이다. 흙구덩이를 파서 바닥에 돌을 깔고 목관을 집어넣는 양식이다.
독무덤.
'독무덤'은 구덩이를 파고 돌로 네 개의 벽을 만들고 관 대신 항아리에 시신을 수습했다. 독 하나를 쓰는 외독무덤, 두 개의 독을 붙여서 쓰는 이음독이 있는데, 외독무덤은 주로 독을 세워서 매장했다고 한다. 뼈만 추린 세골장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시체를 세워서 넣기에는 불편함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독 중에는 2m가 넘는 대형 독도 있어 독을 복원하는 과정에 독 안으로 빠져 사다리를 가져다가 겨우 구출하는 에피소드도 있을 정도다.
굴식 돌방무덤.
'구덩식 돌덧널무덤'은 땅을 파서 네 면을 동시에 돌로 벽을 쌓은 후 관을 아래로 내려서 매장하는 방식이고 '굴식 돌방무덤'은 세 면을 먼저 쌓고 입구를 만들어 두었다가 시체와 부장품 등을 모두 무덤 속에 옮겨둔 후 입구를 막는 방식이다.
이들 무덤 양식은 시기를 구분 짓기보다는 신분에 따라 장법이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간편한 방식이었던 매장 방법은 일반인들이, 굴식 돌방무덤과 같이 공이 제법 들어가는 양식은 지배계급의 무덤 양식으로 추측된다.
구덩이 나무널무덤.
간단한 무덤 양식 옆에는 조상들의 무덤 축조 지혜를 엿볼 수 있는 교동 1호분 봉토 축조 및 구조 모형을 볼 수 있다. '무덤의 내부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를 한눈에 보여준다. 실제 크기가 1~3m에 이르는 뚜껑돌을 덮고 돌 위에 흙을 덮어 다졌다. 고분 중에는 지름이 20m였던 것에서부터 최대 68m에 이르는 것도 있었다. 68m면 낮은 산 하나 정도라고 하니 이 무덤을 축조할 수 있었던 이는 아마도 위세가 대단했던 것 같다.
무덤 축조 모형을 보면 까만 선으로 구획을 나눈 것이 보이는데 현대 학자들은 조상들이 무덤 설계도를 갖고 축조했던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팀별로 구획을 맡아 흙과 돌 등을 날라 무덤을 완성했는데 구획 별로 흙의 색깔과 재질이 달랐던 것에서 미루어 본 것이다. 이렇게 하면 흙의 재질이 섞여 무덤이 더욱 견고해지고 작업도 원활했을 것이니 무덤은 건축물이 남아있지 않은 시대의 건축술을 짐작할 수 있는데 건축기술의 집약이라고 보아도 좋겠다.
고분 축조 모형 옆에는 석실을 재현해 놓았다. 석벽 사이로 전시관을 두어 부장품들을 전시했다. 석벽을 통과하다 보면 무덤 속을 거니는 듯 강렬한 인상을 준다. 양옆의 전시실에는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말띠꾸미개를 비롯해 토기 등이 전시돼 있는데 무덤 속에서는 수많은 금·은 귀금속 제품이 쏟아져 나왔다. 금관도 출토되었지만 지금 우리에겐 없다. 1918~19년 일본이 발굴조사를 하면서 가져가 버렸다고 한다.
전시관 끝쪽에는 계성리 계남 북5호분 출토품이 전시돼 있는데 은제 허리띠와 세 잎 모양의 큰 칼이 인상적이다. 은제 허리띠는 우리가 지금 쓰는 체인이 달린 허리띠를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칼에 보이는 세 잎 모양은 말 장식품에도 나타나는데 아무래도 이 무덤 주인 부족의 상징인 것만 같다.
다소 작다 싶은 창녕박물관도 둘러보니 참말로 알차다. 일본인들도 어찌 알고 왔는지 창녕박물관까지 찾아와 5시간씩 보고 가는 정성을 아끼지 않는다고 하니 우리도 한 번 성심을 기울여 박물관 구석구석에 새겨진 의미를 되짚어볼 일이다.
△ 관람안내 = 운영시간 오전 9~오후 6시. 관람료 성인 500원·어린이 3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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