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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 끊겼어도 추억과 역사 고스란히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1.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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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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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1253
내용

의령에도 낙동강 비리길이 있었다. 지정면 유곡리 백산마을에서 성산마을까지 5km남짓 거리다. 백산마을 들판에서 만난 한 할머니는 자기가 여기 시집 온 지 50년이 넘었는데 옛날에는 이 비리길을 통해 창녕 남지장(2·7일)을 보러 다녔다고 했다.

할머니의 젊은 시절 장 보러 가는 길은 이랬을 것이다. 먼저 장닭이나 푸성귀처럼 내다팔 물건을 쟁여서 지거나 인다. 다음 낙동강을 따라 열린 비리길을 탄다. 성산마을 와서는 기강(岐江=거름강)나루에서 강을 건너 동쪽 창녕군 남지읍 용산마을로 들어간다. 다시 들판을 가로지르고 학계마을을 지나 남지장에 든다. 아침에 이렇게 갔다면 점심이나 저녁 때는 간 길을 되짚어 나오기 마련이겠다.

   
 
  비리길을 걸으면서 볼 수 있는 낙동강 풍경.  

며칠 전 바람이 차게 불던 날 똥금이 된 배추를 뽑아 자식 주려고 갈무리하던 이 할머니는 "아직 길이 남아 있나요? 한 번 가 보고 싶어서요……"라는 물음에 눈이 동그래졌다. "머 할라꼬?" "그냥요." "길이야 있지만 다니기 어려울거로? 새가 우거지서……." '새'는 풀을 뜻하는 토종말이다.

나흘이 지난 20일 다시 나섰다. 합성동 마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 부림면 소재지 신반마을 가는 버스를 10시 50분에 집어탔다. 거기 밥집에서 점심을 먹고는 백산마을행 농어촌버스를 기다렸다. 출발 시각인 오후 1시보다 10분 늦게 나타난 이 버스는 박진을 거쳐 산을 하나 비스듬히 넘더니 멈춰섰다. 15분 남짓 만이다. 의령 낙동강 비리길을 찾아가는 첫걸음이었다.

마을을 지나 제방에 올라 남쪽으로 발길을 놀렸다. 머리에 자동차 한 대 다닐만한 콘크리트길을 이고 있는 제방은 얼마 안 가 끊어졌는데 길까지 바로 끊어지지는 않았다. 흙으로 바뀐 길은 조금씩 허물어진 채 낙동강을 따라 내려간다.

길은 같은 너비로 이어지다가, 콘크리트로 만든 재실 같은 건물 있는 데서 멈춘다. 길은 여기서 대숲을 만나 한 사람이 겨우 다닐 정도로 좁아진다. 맞은편에서 사람이 온다면 비켜가기도 어려운 너비다. 여름이나 가을이면 도저히 걸을 수 없을 정도다. 겨울을 맞아 길을 덮었던 풀과 떨기나무들이 잎을 떨어뜨렸기에 열린 셈이다.

   
 
  좁다란 비리길에 낙엽이 깔려 있다./김훤주 기자  

사람이 다닌 자취는 뚜렷했다. 좁고 때로는 가파르기까지 한 데다 초목이 가로막았지만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때때로 길을 잃기도 했다. 강물 쪽으로 내려가면 어김없이 길은 끊어졌다. 돌이켜 비탈로 올라서면 사라진 길이 나타났다.

비탈에는 소나무와 참나무 팽나무 은행나무 같은 것들이 장하게 자라 있다. 사람이 손대기 어려운 지경에서 자란 덕분이지 싶다. 사이로 떨기나무나 덩굴나무가 있었으나 잎이 진 덕분에 낙동강을 눈에 담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다시 대숲을 만났다. 대숲을 끼고 오른쪽으로 도니까 감밭이 있었다. 그러면 농사 짓는 사람이 여기까지 온다는 얘기겠지. 낫으로 나무를 찍어서 열어놓은 길이 있었다. 성산 마을로 나가는 길목이다. 시각을 확인하니 4시가 다 돼 있었다.

마산으로 가는 버스는 3시 10분 즈음에, 신반으로 들어가는 버스는 3시 40분 즈음에 성산마을 정류장에 들른다. 이미 이것들을 타기는 어렵게 됐다. 그렇다면 마산 나가는 6시 50분 즈음 버스만 남았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정류장 앞 구멍가게에서 요기를 하고 막걸리 따위로 몸을 데울 수 있다면 끝까지 기다려서라도 막차를 타고 아니면 택시를 불러 타고 나오기로 했다. 그런데 담배 말고는 파는 물건이 거의 없었다. 흔한 컵라면조차 없었다. 술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깡술'을 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구멍가게 아주머니는 같은 의령의 신반보다 함안 대산 택시를 부르는 편이 낫다고 했다. 택시를 불렀더니 10분 남짓 걸려 왔다. 비상금 1만 원을 털어 주고 대산 내릴 때 보니 5시 15분이었다. 10분 뒤 함안과 마산을 잇는 113-1번 시내버스가 왔다.

돌아오는 길에 이 비리길을 되살려 보전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을 걸으면서 옛날 사람들 5일장을 중심으로 모이고 흩어졌던 세상 사는 방식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또 솔숲을 거닐면서 건강도 챙길 수 있겠다. 이에 더해 비리길 둘레를 간벌하고 조금만 다듬으면 남지 개비리길보다 더 좋은 길이 될 것 같았다. 여기서 보는 낙동강 자태는 매우 의젓했다.

게다가 길이 끝나는 성산마을의 기강나루(남강과 낙동강의 합류 지점)는 역사에 뚜렷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의병장 곽재우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5월에 여기서 왜적의 척후선을 격침하고 첫 승리를 일궜다. 강바닥에 나무를 박고 그 나무를 밧줄로 엮어 적선을 꼼짝할 수 없게 만든 다음 화살 공격으로 상대를 해치웠다.

그래서 여기 들머리에 곽재우의 기강 전투 승리를 기리는 보덕각이 있다. 기강 전투는 그 자체로만 보면 조그맣지만 이 승리가 없었다면 이어지는 정암진 전투 승리도 없었으리라 잘라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이기는 바람에 의병에 대한 사람들 생각이 달라져서 곽재우 휘하 의병이 이전보다 네 배 가까이 늘어났다.

보덕각 옆에는 임진왜란 당시 마진 전투에서 숨을 거둔 의병장 손인갑·약해 부자를 기리는 쌍절각도 있다. 이런 유적과 비리길을 잘 연관지으면 스스로를 '충의의 고장'으로 내세우는 의령군 위상이 한 단계 더 높아질 수도 있겠다. 지금 당장은 걸어보시라 권할 수 있는 길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여러 사람이 함께 숨쉬는 그런 길로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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