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가 뭡니까?" 나이가 지긋한 정장 차림의 한 중년이 판화작품을 보고 주위사람에게 물었다. "…." "…."

다들 멀뚱멀뚱했다. 그때 백시출 창원상공회의소 부국장이 나섰다. 리안갤러리 김효정 실장을 불렀다. "A.P는 일종의 서명인데, 작가 보관용을 의미해요. A.P는 영어로 Artist Proof의 줄임말입니다." 김 실장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15일 창원시 성산구 웅남동 경남스틸 신사옥 5층 '송원갤러리'에 경제계, 문화계 관계자 100여 명이 참석했다. 전시공간이 436㎡(약 130평)에 달하는 꽤 큰 규모로 경남스틸 최충경 회장이 1995년부터 모은 150여 작품 중 80여 점을 공개했다. 자신의 소장품을 대중과 함께 느끼고 즐기겠다는 취지다.

◇올해도 2곳 생겨 = 올해만 도내에 기업이 운영하는 갤러리 2곳이 생겼다. 서울 등 수도권 지역은 기업이 운영하는 갤러리가 많지만, 도내에는 2009년 12월 창원상공회의소 1층 '챔버(chamber)갤러리'가 1호다.

최충경 창원상공회의소 회장은 그 당시 인사말에서 "개별 작품은 기업에서 손비처리가 가능한 300만 원으로 책정했다. 기업이 작가를 많이 도와주어야 한다"며 문화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드러냈다. 챔버갤러리를 거쳐 간 작가만 해도 현재 20명 가까이 된다.

   
  경남은행 아트갤러리.  

지난 5월 경남은행도 창립 24주년을 맞아 본점 1층에 'KNB 아트 갤러리'를 개관했다. 원래 폐컴퓨터 같은 잡동사니를 쌓아두는 창고였고, 그 안엔 은행이 보유한 수백 점의 그림이 있었다. 지난해 취임한 박영빈 은행장이 그 사실을 알고 "좋은 그림들을 왜 썩히고만 있느냐? 은행 내 공간에 전시관을 만들고 고객과 주민들이 편하게 와서 관람할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하면서 갤러리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밖에 한국전력공사 경남본부도 '해뜨락 아트홀'(가칭)을 개관하고자 논의 중인 걸로 알려졌다. 올해 상반기 한국전력공사는 사옥 2층 옥상에 '해뜨락 홀'을 만들어 직원들에게 휴식이나 회의 공간으로 제공했고, 이곳에서 한전경남지역본부 포토클럽 회원 전시를 열기도 했다.

◇마케팅을 넘어선 사회공헌 = 문화예술을 후원하고 문화예술 소비를 촉진하는 메세나. 오늘날 기업의 문화 마케팅은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단순한 문화 행사 후원을 넘어 갤러리나 아트홀 등을 운영하면서 기업 이미지를 새롭게 만들고 소비자들이 이를 직접 체험하게 하고 있다.

한국메세나협의회가 회원사 642개사를 대상으로 '2011년도 기업의 문화예술 지원현황'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문화예술 지원을 통해 얻는 효과는 크게 기업의 정당성, 시장 우위, 종업원 혜택 등 세 가지인 것으로 나타났다.

삼성문화재단은 1965년 기업이윤의 사회 환원이라는 명목으로 설립됐고 2004년 삼성미술관 리움을 개관해 운영하고 있다. 2007년 개관한 두산갤러리는 국내 젊은 작가들의 새로운 시도를 꾸준히 지원하고 있다. 이 밖에도 포스코(포스코미술관), KT&G(상상마당), 롯데·신세계백화점(갤러리), 신한은행(신한갤러리) 등 기업이 운영하는 미술공간이 대중화되고 있다.

A기업 관계자는 "기업이 지역문화를 지원하는 데 대부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문화에 대한 대중의 욕구가 높아지면서 가속화한 현상이다"라고 설명했다. 경남은행 갤러리에서 만난 한 관람객도 "경남에 문화예술 인프라가 부족한 게 사실인데, 기업들이 갤러리를 연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덩달아 기업 이미지도 상승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창원상의 챔버갤러리.  

◇장기적인 계획과 지원 필요 = 다만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다. 도내에 문을 연 창원상공회의소 '챔버갤러리'나 경남은행 'KNB 아트 갤러리', 경남스틸 '송원갤러리' 등은 대부분 판매보다는 전시를 목적으로 한다.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아, 구체적인 전시 계획이나 운영 방향 등도 미비한 상태다. 창원상공회의소는 현재 지역 작가들에게 무료로 공간을 제공하는 한편, 전시와 관련된 비용도 부담하고 있다. 경남은행도 무료초대 형식으로 전시를 하며 대여를 원하는 작가가 있으면 포트폴리오 심사 후 결정한다. 송원갤러리는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나오지 않았지만, 작가들에게 무료로 갤러리를 개방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경남스틸 송원갤러리.  

김해문화의전당 이영준 전시팀장은 "기업이 전시 공간을 작가에게 개방하는 것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내실 있는 운영을 하지 않으면 오래 가지 못한다. 갤러리에 대한 전문적인 인력을 투입해 운영해나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기업 내 갤러리가 많아지는 건 당연히 좋은 현상이다. 하지만 양적인 성장뿐만 아니라 질적인 성장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를테면 △큐레이터 고용 △공모를 통한 전시 △미술 관련 강연회와 세미나 개최 등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