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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3·1 만세운동의 상징 유관순 열사 순국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3·1 만세운동 100주년이었던 작년에는 독립운동에 관한 많은 전시와 행사들이 있었지만, 올해 3월에는 코로나 영향으로 관련 행사들이 취소되어 그러한 이슈들을 접하기 어려웠습니다.
1919년 3월 1일에 시작된 자주독립을 향한 뜨거운 함성은 4월 말까지 지속적으로 한반도 전역에서 메아리쳤습니다. 경남에서도 대대적으로 일어났던 4월 2일, 3일을 포함해 4월 말까지 창원, 마산, 진주, 김해, 함안, 함양, 통영, 거제 등 전 지역에서 만세운동이 이어졌습니다.
사실 3·1 만세 운동은 많은 곳에서 여성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이후에 전개된 항일 운동의 근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바로 여성들의 연대였습니다. ‘안사람 의병가’를 짓고 군자금을 모아 의병활동에 가담했던 윤희순, 교사 재직 중 학생들과 함께 비밀여성독립운동단체 송죽회를 결성했던 김경희, 일본에서 한국으로 2·8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들어와 배포하고 애국부인회·근화회를 조직하여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활동했던 김마리아, 신채호 선생의 아내로서 3·1운동 부상자들을 간호하고 만세운동에 참여했으며 간호사들의 독립운동단체인 ‘간우회’를 만들어 활동한 박자혜, 만주 무장항일조직에서 활동하면서 일제총독 처단을 시도한 남자현, 조선의용군 항일투쟁의 최전선에서 여자부대를 지휘했던 조선의 잔다르크라 불리던 여장군 김명시,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전투력을 길러 광복군 비행대 작전을 세웠던 권기옥, 여성 광복군 지복영, 오광심, 조순옥, 신정숙, 장경숙, 임소녀, 정영순 …. 그 위대한 이름들은 다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이렇게 항일운동의 과정에는 유관순 열사와 같은 수많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이 존재했지만, 여성 지사들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서훈을 받은 여성독립운동가는 432명으로 전체 독립 유공자 1만5511명 중 2.7%에 불과하며, 서훈을 받은 분들에 대해서조차 거의 연구되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성독립운동가들의 행적에 관한 자료나 유품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그 현장성이나 사실 관계를 기록하고 연구 조사하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여성이 독립운동을 한 경우 대체로 자손이 없어 그 유품이나 사진, 관련 자료들이 보존되지 못하거나, 그나마 남아 있던 것들도 일제의 감시와 핍박으로 인해 간직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제라도 더 늦기 전에 사라져 가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자료와 기록들을 찾고 모아 연구하고 보존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3월과 4월에 있었던 경남의 시위에서도 여성들은 주도적 역할을 했습니다. 마산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김필애 열사는 의신학교 교사로 교원, 학생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펼치고 추산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습니다. 또한 김해의 만세 운동은 3월 30일 김해 읍내에서 시작되어 4월 5일 진영시장, 11일 명지면, 그리고 12일 장유면 무계리 대규모 만세운동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3월 30일 김해의 첫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것도 바로 서울 정신여학교 재학 중 고향 김해에 내려와 있었던 구명순 열사였습니다. 또한 통영에서도 3월에 계속되었던 만세운동이 절정을 이룬 4월 2일 장날 4000여명의 군중들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에서 선봉에 선 것은 이소선, 정막래 열사를 비롯한 33명의 기생들이었습니다.
적어도 한 해에 3월과 4월만큼은 나라를 되찾는데 남녀가 따로 없다는 생각으로 용감하게 구국의 대열에 앞장섰던 여성독립운동가들을 추모하고, 고난의 바다를 헤치고 아무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던 그 분들의 용기와 신념을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최정은(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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