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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ON] 부자 氣받기- 삼성·LG·효성 창업주 이야기 ⑤ 이병철의 첫 사업, 마산에서 정미소 운영하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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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415
내용

[주말ON] 부자 氣받기- 삼성·LG·효성 창업주 이야기 ⑤ 이병철의 첫 사업, 마산에서 정미소 운영하다


또 하나의 가족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스물 여섯 청년 이병철, 첫 사업으로 마산에 정미소 열다
1936년 초기투자금 3만원으로 3명 공동출자


  • “아버님 사업을 하겠습니다.”

    “사업에 좌우되지 말고 사업을 좌우하라.”

    이 16자로 조합된 이병철 아버지의 말씀이 이병철로 하여금 세계의 경제인으로 만든 근본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호암자전에 이병철의 창업관이 무엇인가를 예측하게 하는 내용이 있다. “사업은 한 개인이 제 아무리 부유해도 사회 전체가 빈곤하면 그 개인의 행복은 보장받지 못한다. 사회를 이롭게 하는 것, 그것이 사업이다.”

    1934년 10월, 아버지로부터 300석분 땅을 받은 이병철은 서울을 비롯 대구, 부산, 평양 등 여러 도시를 다니면서 사업대상을 찾아 다녔다. 하지만 본인이 준비한 자금으로 큰 도시에 진출하기에는 부족함을 느꼈다. 결국은 고향 의령과 가까우면서 당시 큰 도시인 마산을 후보지로 선택했다.

    1899년에 개항한 마산항은 1910년 12월부터 1945년 해방까지 일본병참기지 수탈물자, 전쟁물자 적출항이었다. 또한 경남 일대의 농수산물 집산지이기도 했다. 수백만 석의 쌀이 마산항에 모였다가 일본으로 송출되는 등 물자와 돈, 사람의 움직임이 제법 큰 항구도시였다.

    협동정미소 운영할 때 정미소 야적장에 적재된 쌀./제일모직 50년사/
    협동정미소 운영할 때 정미소 야적장에 적재된 쌀./제일모직 50년사/

    일제강점기 식민지 산업정책으로 공출을 위해 농토와 쌀 생산이 많은 남쪽에는 식량증산이나 경공업 중심관련 경제정책이 펼쳐졌다. 당시 마산에는 쌀을 도정하는 정미소 중 제법 큰 규모는 모두 일본인이 운영하고 있었다. 한국인이 하는 정미소는 도정능력이나 시설이 열악했다. 이병철은 정미소 사업을 결심했다. 규모를 크게 하면 일본 정미소와 경쟁을 해도 뒤처지질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병철이 초기 투자금 1만원으로 원하는 규모의 정미소를 운영할 수 가 없었다. 이병철은 공동사업을 제안했다. 세 사람이 각자 1만원씩 출자해 1936년 3월, 자본금 3만원으로 지금의 마산 북마산거리에 정미소를 설립했다. 그렇게 이병철은 스물여섯 살에 생애 첫 사업을 시작했다. 현재의 기준으로 대학을 갓 졸업한 나이의 청년 창업가였다.

    창업 시작 1년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지만 경험부족, 도정사업 내용 이해부족 등으로 자본금의 절반 이상을 손해 보았다.

    실패를 인정했지만 이병철은 첫 사업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다. 실패의 원인은 장사의 원리를 미처 이해하지 못한 것과 시장조사를 게을리 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이렇게 실패의 원인을 면밀히 검토한 후 이병철은 다시 정미소사업을 계속했다. 다음 결산에서는 보란 듯이 작년도의 손해를 만회하고도 이익을 창출했다.

    이병철의 정미소가 있었던 회원천 다리를 중심으로 한 도로변의 2021년 풍경./이래호/
    이병철의 정미소가 있었던 회원천 다리를 중심으로 한 도로변의 2021년 풍경./이래호/

    # 삼성의 원조 마산이어라

    이병철은 1936년 3월부터 1937년 9월까지 1년 6개월 정도 북마산에서 협동정미소를 운영했다. 세계적인 기업이 된 삼성그룹 창업주의 첫 사업지 터는 그 상징의 가치가 매우 높다. 필자는 협동정미소에 대한 티끝 같은 기억의 증언, 문서검증, 전문가 및 학자 의견 등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정미소 터를 찾아보았다. 현장검증에 도움을 준 95세 되는 분도 85년 전 아버지가 방앗간을 갈 때 따라간 기억은 나지만 정확하게 그 장소를 지정하지는 못하였으나 증언 내용은 협동정미소 공장터 근접한 거리에서 맴돌고 있다.

    회고록에 등장하는 이병철과 정미소 동업을 한 정현용과 박정원 두 분 이름만 가지고 합천의 집성촌을 찾아 탐문도 해보았다. 1930년대 당시 20대 젊은이가 정미소를 운영하는 것에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오늘날 세계적인 대기업이 될 줄 몰랐다. 그래서인지 증언의 내용은 대부분 ‘~ 카더라’, ‘했다더라’에 제한돼 있다. 일제 강점기 기업자료인 ‘조선기업요람’에도 기록되지 않은 것은 협동정미소가 주식회사와 같은 법인이 아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1911년 마산에 전기가 들어온 후 전기를 사용한 기계화 정미소는 1930년경 약 27개가 있었다. 최초의 법인 정미소 1호는 1937년 지금의 남성동에 손형업이 설립한 흥업정미소이다.

    지역 역사학자가 추천하는 3곳은 아직 문서로 증명할 수 없어 결과를 공개하지 못하고 있다. 삼성그룹 계열사 출판 서적을 통해 추측해보면 도정을 하는 공장터와 부속건물, 그리고 북마산역을 통해 대량 유입되는 곡물을 저장하는 대형창고가 있는 야적장 등 협동정미소는 2곳을 사용한 것으로도 추측된다. 4곳의 정미소 터 주소를 확보해 최종 확인을 위한 문서증명을 신청했지만 개인정보 공개불가 때문에 어려움이 많다. 100년이 되어 가는 사회적 자산이 될 경제, 문화 자료에도 개인정보보호법이 적용되니 필자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시청, 관광기관, 경제기관, 대학 등 공공기관에서 조금만 관심을 가져주면 요즘 같은 정보화 세상에 이병철의 협동정미소 흔적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져본다. 흔적을 사실로, 기억을 기록으로 할려면 결국 문서나 사진의 증명이 필요하다. 사람을 통한 기억으로 찾는 것은 이제 어려울 것 같다.

    대구에는 이병철이 사용한 삼성상회 터에 한국인은 물론 외국인도 끊임없이 방문을 하고 있다. 이른바 삼성의 원조는 마산인데. 아쉽고 안타깝다. 요즘은 무명시절 작품을 쓰기 위해 1개월 머문 곳도 그 흔적을 중요시 여겨 작가가 머문 집 이라는 이름으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마산 협동정미소는 세계적 기업이 된 삼성의 뿌리이다. 반드시 찾아 흔적과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산 경제사의 자존심이 아니라 한국 경제사의 자존심이다.

    늦었다고 포기하거나 중단하지 않고 출발하면 그것이 가장 빠른 출발이라고 한다. 벌써 85년이 훨씬 지났다. 시간이 흐를수록 찾는 것이 어려울 수가 있다. 협동정미소를 반드시 찾아서 이곳을 찾는 방문객에게 복주머니에 쌀 한줌을 기념품으로 넣어서 삼성의 부자기를 받도록 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 기대한다.

    # 쿠바에서 모히또 한잔을

    이래호 ㈜차이나로컨벤션 대표
    이래호 ㈜차이나로컨벤션 대표

    기업의 탄생과 성장과정은 매우 흥미로운 관계이다. 1955년 4월 미국 일리노이주 한 마을에서 개점한 햄버그 가게가 세계적 기업으로 크게 될 줄 아무도 몰랐다. 그곳 맥도날도 1호점이 미국 역사의 한켠을 차지하는 박물관이 되었다.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노인과 바다’의 저자 헤밍웨이가 쿠바에서 머문 호텔과 모히또 한잔을 시켜놓고 바다를 바라보았던 카페안의 테이블에서 헤밍웨이의 흔적을 확인하고 싶어 지구촌 곳곳에서 찾아가고 있다.

    일제강점기 진주시에 거대한 자본과 조직으로 설립한 미나카이 백화점과 함께한 진주 최초 개인이 운영한 이병철의 매형 허순구의 문성당 백화점터와 진주고택, LG그룹 구인회의 진주 포목상점 간판 해석, 구인회의 운수사업장 차고지, 효성그룹 조홍제의 마산 철가공 사업체 육일공작소터와 창업주 인적내용, 조홍제가 한국기원 이사장을 한 경력 등 새로운 기록물의 소득도 적지 않다. 이러한 주요 자료도 검증을 거쳐 연재중 소개할 예정이다.

    이래호 ㈜차이나로컨벤션 대표

    이명용 기자 mylee@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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