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전시소식
미협 거제지부, 세미나 열어…"조선인 삶 표현한 민중 작가"
거제에서 태어났지만 지역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양달석(1908~1984) 화백. 그의 삶과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세미나가 (사)한국미술협회 거제지부 주최로 지난 10일 거제문화예술회관에서 열렸다.
'양달석 평전'을 집필 중인 김의균 씨가 '양달석의 화업 인생과 작품 세계'를 주제로 1시간가량 발표를 했고 토론자로는 박은주 전 경남도립미술관 관장이 나섰다.
세미나에는 양달석 화백의 친딸인 양혜정(74) 씨도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양달석은 1908년 거제군 사등리 성내에서 태어났다. 진주국립농업학교 3학년 때 일본 오사카신문사가 주최한 '전일본 중등학생 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받았다. 당시 국어 교육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에 앞장섰다가 퇴학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193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서 청강생으로 공부했지만 병에 걸려 1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1932년과 1937~1939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했다. 1940년 거제에서 부산으로 이사를 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양달석은 '소와 목동'을 즐겨 그렸다. 그는 비망록에 "나는 소를 나의 부모처럼 혹은 자식처럼 그려왔다. 소 등에서 낮잠 자는 그림, 비가 올 때 소 밑에서 비를 피하는 그림 등도 이때의 인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고백했다.
큰아버지 집에서 자란 그는 소 먹이는 목동을 도와 일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은 목가적이며 동화적이다.
양달석 작 '귀로' |
양달석은 1942년 부산미술전 서양화부에서 작품 '초원'으로 최고상인 부윤상을 받으면서 기반을 잡았다. 당시 부산의 근대 화단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
서성찬, 김남배, 우신출 등과 함께 최초 미술 동인인 춘광회를 결성했고 1946년 초창기 한국미술협회 부산지부장을 맡았다. 6·25 전쟁 당시에는 종군화가로 나서기도 했다.
1960~1970년대는 부인의 권유로 원불교에 심취해 불교 사상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1962년 제1회 경상남도 문화상과 사회유공 표창을 받았다.
양달석 화백 |
중풍으로 쓰러진 이후에도 붓을 손에 묶어서 그림을 그릴 정도로 열정이 대단했다. 양달석은 살아생전에 "좀 더 좋은 그림을 남들이 모방할 수 없는 나의 그림을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이 친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려고 애써왔다"고 말했다.
김의균 씨는 양달석에 대해 "서양화가이지만 소재가 동양화에 밀접하고, 소와 목동 등 조선 민중의 삶을 자기의 삶처럼 표현한 진정한 민중 작가"라고 평했다.
박은주 전 관장은 "5년 뒤면 양달석 화백이 탄생한 지 100주년 되므로 그 전에 정확한 연보와 자료를 바탕으로 한 그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친일·좌익 행적 논란…"무리한 추측">
이날 세미나에서는 양달석의 친일·좌익 행적도 논란이 됐다.
서예가 허인수는 "양달석 화비를 세울 때 지역 주민들이 친일파라면서 반대를 했다"며 정확한 해명을 요구했다.
박은주 전 경남도립미술관 관장은 이에 대해 '무리한 추측'이라고 설명했다. "어렸을 때 일본 사람이 주최한 미술대회에서 상을 받은 것 때문에 그런 논란이 있는데 설득력이 약하다. 오히려 친일파보다 공산주의자·좌익이라는 말이 많았다. 빨갱이로 몰려 두 번이나 고문을 받았고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 배경은 조선미술가동맹이 탄생할 때 부산지부장을 맡았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자신이 잘못 가입했다는 것을 알고 바로 협회에서 나온 것으로 안다."
양달석 화백의 친딸 양혜정 씨도 "아버지는 친일파도, 좌익도 아니다. 내가 제일 잘 안다"고 말했다.
경남도민일보 스크랩
게시물수정
게시물 수정을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댓글삭제게시물삭제
게시물 삭제를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