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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 창원대 1회 졸업생 김철수 교수(창원전문대 산업디자인과)

작성자
박주백
작성일
2010.03.19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1846
내용
Inter+view ⃒ 창원대 1회 졸업생 김철수 교수(창원전문대 산업디자인과)

“인생의 목표를 세워 포기하지 말고 노력해야”

이번 인터뷰의 주인공은 우리대학 1회 졸업자인 79학번 김철수 선배님이다. 인터뷰 약속은 11일 오전 11시 선배님의 연구실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진짜 인터뷰를 위해 만난 곳은 정우상가 근처 마X구이집이였다. 시간은 10일 늦은 11시 30분이었다. 처음 인터뷰하기로 결정했을때, 교수라는 직업 때문에, 그리고 79학번이라는 너무나 많은 차 때문에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많은 고민을 했었다. 그러나 그와 처음 대면했을 때 나의 고민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내게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말했다.
“요즘은 대학면접 볼 때 마지막은 술집으로 간다고하지. 술 얼마나 잘 마시나 보려고 말이야. 내 연구실에서 앉아서 질문지 받은 거 가지고 인터뷰하면 그게 무슨 인터뷰겠나. 그건 시험 치르기 전에 문제지 다 나눠 주고 시험 치는 거랑 똑같은 거지. 이렇게 술자리에서 둘이 이야기 주고받으면서 인터뷰해야 진솔한 기사가 나오는 거지.” 말은 끝낸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나에게 소주 한 잔을 권했다. 평소 주는 술을 거부하지 않는 기자였기에 흔쾌히 잔을 받아들었다. 그렇게 조금 취기가 올라왔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그와 창원대학교

“내가말이지 우리대학이랑 인연이 깊은 사람이야. 일단 내가 1회 졸업생이지. 1대 연회장 그러니까 지금의 총학생회장이지. 그리고 내 집사람도 거기 1회 졸업생이기도 하고 내 딸도 창원대 학생이었고 말이야.” 그에게 창원대는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서 문득 궁금증이 생겨났다. 그가 다니던 때의 창원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때 창원대는 지금 위치에 있긴 했지만, 많이 달랐지. 내가 입학했을 때는 아직 공사시작도 하지 않은 상태였어. 내가 학생 대표로 기공식에도 참여했거든. 지금의 창원대가 완공된 때는 졸업식을 할 때 쯤이였어. 그때는 흙먼지 날리는 벌판에 건물 이 달랑 2개만 새워져 있었지” 그렇게 술잔이 여러 번 오고갔다. 어느덧 시간은 자정을 지나 새벽1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야기는 어느덧 그의 20대 대학시절로 향해 가고 있었다.

그의 대학시절 그리고 꿈

“내가 입학할때 27살이었어. 내가 예술고를 나왔는데 그 당시에 집안형편이 너무 안 좋았어. 부모님 두 분 다 여의고 대학을 갈 수가 있나, 그래서 2년정도 일을 하고, 군대 3년갔다가 다시 2년을 일해서 돈을 벌었어. 그리고 시험쳐서 창원대에 합격했지. 그때 창원대 시험은 난리도 아니었지. 400명 뽑는데 1만 명이 지원했지. 경쟁률이 17.8대 1이나 되었거든. 그래서 가포에서 응시생을 다 수용하지 못해서 마산에 있는 모든 중고등학교를 다 빌려서 시험을 쳤어. 한 시험장에 40명정도 쳤는데 그중에 합격하는건 1~2명 뿐이었어. 그래서 내가 합격했을때 난리도 아니였지 우리집은 물론이고 내가 일하는 공장까지 다 같이 기뻐해 주었지. 그렇게 어렵사리 입학을 해서 대학교에 다니니까 얼마나 공부가 하고 싶었는지 몰라. 15살조카랑 같이 공부했지. 하루에 6시간 이상은 꼭 공부를 했어. 목표가 있었거든. 우리대학 교수가 되어서 총장이 되는 것 그게 내 목표였지” 술에 취한 것일까 아니면 추억에 취한 것일까.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했다. 그리고 그는 말을 이어 나갔다. “뭐, 결국 입학할때 목표한 바는 다 이루지 못했지. 그래도 열심히 공부해서 우리대학 제1호 강사가 되었어. 강단에 섰을EO 학생들이 교수님이라고 불러주는 것이 얼마나 좋던지. 가진 건 없었지만 그래도 기분만은 좋았자. 그리고 스승의 날 때 학생들이 나에게 꽃을 달아주었네. 그때 실은 내가 그 꽃을 받아도 되는지 의심스러워 내 스스로 꽃을 가슴에서 빼내었네. 그런데 내 대학시절 은사님이 그걸 보시더니 내 가슴에 다시 꽃을 달아주시더군. 그때 왠지 가슴이 뭉클했어.. ‘내가 진짜 가르치는 사람이 된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더군..”
목표를 가지는 것은 쉽다. 그러나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달렸다. 그리고 강사시절을 지나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목표를 다 이루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미 충분하지 않은가? 20대의 기지가 지금 그 보다 30년 선배에세 열정을 느끼고 있었다. 왠지 모를 부끄러움이 들었다. 이번에는 기자가 그에게 술을 권했다.

오늘날 20대에게 말하다
“인생이란 홀로 내던져 있는 것이야.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돼! 인생의 거친 파도와 혼자 맞서야해, 결코 포기해서는 안되는거야. 자네 같은 20대는 더욱더 그래. 티 없이 맑고 순수하지. 그래서 현실에서 큰 상처를 받을지 몰라. 그리고 포기해 버리고 싶어질 때도 있을거야. 그러나 결코 그러면 안되지. 젊다는 것이 뭔가? 열정과 패기가 있다는 것 아닌가? 에너지가 넘친다는 것이야. 다시 일어 설 수 있다는 거지. 자신이 정한 목표를 이룰 EO 까지 포기말고 끝임없이 노력하게. 그러면 이룰 수 있을거야!”
그는 조금 격양된 표정으로 학교선배로서, 그리고 인생의 선배로서 말했다. 나에게 그리고 현실에 힘들어하는 우리에게 말했다. “지금 내가 설립한 대산미술관이 있어. 주위에서 대산미술관 설립과 운영때문에 여러가지 상들을 준다고 했지만 그 상에 전부 다 스폰서들이 붙어있어서 거절했지. 내가 돈 벌려고 미술관을 설립한 것이 아니니까. 그래서 많은 이들에게 훌륭한 작품을 보여 줄 수 있도록 무료 관람전을 계속 열고 있어. 단순히 내 꿈 때문이지. 지금 내 꿈이 뭔지 아나? 그저 봉사하고 베풀며 사는거야. 그리고 이왕이면 좋은 벗들과 좋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함께한다면 더 좋겠지. 짧은 인생 귀하고 소중하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며 살고 싶어...그게 내 꿈이야” 그렇게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이야기를 마치고 자리에 일어나니 시간은 어느새 새벽2시가 되어있었다. 조금 쌀쌀한 날씨였지만 나는 추운줄 몰랐다. 술에 취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인터뷰를 마친 내 마음 어디선가 뜨거운 무엇인가 솟아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찬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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