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생인 그는 서울대 법대를 나와 미8군 땅에서 영어성경과 비행기 표를 팔다 이왕이면 '위대한' 책을 팔고 싶어 2년간 브리태니커 본사에 편지를 보내 서른두 살 되던 1968년 엔사이클로피디어 브리태니커 코리아에 몸담게 된다.

1971년 "나이가 몇 살이건, 고향이 어디건, 어느 학교를 나왔건, 지난날 무슨 일을 했건, 스스로 똑똑하다 생각하는 사람, 능력이 있는데 아무도 안 알아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소개서를 써 사서함 몇 호로 보내라…"라는 광고 카피를 써 뒷날 웅진 회장이 된 윤석금 같은 이에게 잿빛 바지에 감색 블레이저를 입히고 쌤소나이트 하드케이스를 들려 피아노 한대에 12만 원 하던 시절 18만 3600원짜리 백과사전을 팔기 시작한다.

엄청난 성과를 거둔 그는 브리태니커 200년 역사상 첫 동양인 지사장이 되고 험프리 전 미국 부통령으로부터는 '내가 만난 비영어권에서 가장 영어 잘하는 사람'이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그가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일의 시작은 1976년 우리나라 잡지 역사, 출판역사, 아니 문화사에 길이 남을 한 권의 책을 발간함으로써 시작된다.

최초의 가로쓰기, 한글전용책. 편집 디자인, 타이포 그래픽(글꼴)의 개념을 처음 도입했던 책. 조선일보 주필이었던 당대 문필가 선우휘의 글을 고쳐 써서 들고 갔던 편집인이 편집하는 책. 그 책은 '하지 않을 일'을 정하고, 일본 문예춘추 같은 책은 만들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시작되었다.

뒷날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낸 배우 김명곤, 김대중 정부에서 연설담당 비서관을 지내고 지금 850만 명에게 아침편지를 보내는 고도원 같은 이가 기자로 일을 했고 뒷날 충북대 철학과 교수가 된 윤구병, 김형윤, 설호정 같은 이가 편집장을 맡았던 책.

1980년 8월호로 4년 반 만에 신군부에 의해 폐간되었던 그 책은 〈뿌리깊은나무〉이고 발행인은 한창기다. 덖음차, 반상기, 다기 등 잡지사가 문화사업을 이 땅에서 처음 시작한 이도 그이고, 판소리 열두 마당 중 다섯 마당의 음반과 오선지 악보를 남겨 판소리가 사라지는 것을 막은 이도 그다.

이 책은 두 측면에서 기존 책(잡지)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용 면에서는 - 기품있는 비판정신, 이것이 〈뿌리깊은나무〉를 다른 책들과 구분하게 해 주는 독보적인 특징이었고(강준만·전북대교수), 〈뿌리깊은나무〉를 넘어서는 잡지가 없다는 것은 곧 〈뿌리깊은나무〉의 '보편적 불온성'을 넘어서는 잡지가 없다는 뜻이다. "보편적이면 쓰레기이고 불온하면 보편적이지 않기 십상이다."(김규항·어린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라는 평가가 말해 주듯 직설적이지 않지만 새로운 태도로 그 시대를 조명했다.

형식면에서는 엄격성이다. 고쳐 쓰고 또 고쳐 써 보통 사람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표현, 그리고 우리 말의 맛과 뜻을 되살리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두 가지 예만 들고자 한다. 1978년 7월호에 실린 '대한민국 헌법의 뜻은 이러하다'에서 유신헌법 제45조1항을 이렇게 고쳐 썼다. 제45조 1항 大統領(대통령)의 任期(임기)가 滿了(만료)된 때는 統一主體國民會議(통일주체국민회의)는 늦어도 任期滿了(임기만료) 30일 전에 後任者(후임자)를 選擧(선거)한다 → 새 대통령의 선거는 늦어도 그 전임자의 임기가 끝나기 서른날 전에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한다.

1980년 신군부 독재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첫 합병호를 내고는 6월 24일자 동아일보에 이런 광고를 실었다. "내용은 그리 텅 비지 않았습니다. 애써 낸 이 육칠월 합병호가 걸러버렸던 유월호의 벌충이 됩니다 (중략) 약속했던 대로 이 합병호는 여느 때보다 좀 두텁게 만들었습니다/ 알 권리와 생각하는 자유가 소중한 잡지 (하략)" 그리고 8월 5일자 같은 신문에는 이런 광고가 실렸다. "독자와 필자 그리고 광고주와 책방 주인들께, 네해 반 동안 뿌리깊은나무를 아껴 주셨던 많은 분들의 은혜 갚는 일을 뒤로 미루게 되어 죄송합니다. 칠월 하순에 나온 팔월호를 끝으로 뿌리깊은나무가 더는 나오지 못하게 됨에 따라 아래와 같이 알립니다. (하략)"

   

무릇 이 땅에서 종이에 뭔가를 인쇄해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한 번은 읽어 볼 책이지 싶다 - 뿌리깊은나무 아니면 샘이깊은물. 책 〈특집! 한창기〉(2008년, 창비)를 대하기 전 그의 이름 석자 들은 적은 없지만 〈뿌리깊은나무〉는 수권을 읽었고 출판사 뿌리깊은나무가 발간한 단행본 몇 권은 소장하고 있다. 1997년 예순 한 살의 적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가 많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