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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기획/ 최치원 발자취를 따라 (1) 중국 양저우 다시 가보니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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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1172
내용

지난 2007년 양저우 당성에 건립한 ‘최치원 기념관’에서는 매년 10월 15일 제향행사가 열린다. 올해는 2층에 사료관을 개관해 기념행사를 가졌다.
최치원기념관 2층에 개관된 사료관에서 구상찬 상하이 총영사 부부와 치샤오샤 양저우 부시장, 최광주 경주최씨 경남종친회장, 최염 중앙종친회장(왼쪽부터)이 전시물을 둘러보고 있다.
최양식 경주시장이 최치원 동상 앞에서 제례를 하고 있다.
최치원 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는 계원필경.
최치원 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는 최치원 영정.
당성에서 바라본 양저우 모습. 길게 뻗은 계단이 인상적이다.
양저우 수서호. 물줄기 끝으로 당성이 보인다.


2. 귀국 후 개혁 꿈 이루려고 했지만
3. 어지러운 세상 관직 버리고
4. 경남에서 마지막 여생을
5. 경남의 흔적 문화자산으로



본지는 경남의 문화유산을 살찌우기 위해 우리 지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최치원 선생을 재조명하는 ‘최치원의 발자취를 따라’ 기획을 마련했다. 선생이 환생해 중국 유학시절부터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자신의 행적을 더듬어 보는 스토리텔링 형태로 보도한다. 1000여 년 전의 행적이라 정확한 기록이 없는 것은 전문가의 조언을 바탕으로 약간의 각색도 했다.



나는 통일신라시대 학자 최치원으로, 경주 최 씨의 중시조입니다. 나는 경남신문 기획 ‘최치원 발자취를 따라’에 의해 환생했습니다. 857년에 태어났으니 1150여 년이 지났네요. 지금은 나의 후손이 100만 명을 넘었다고 하더군요. 최근에는 한·중 정상회담에서 나의 시가 인용돼 유명세를 떨치기도 했다던데요. 경남은 마지막 여생을 보낸 곳으로 출생지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마음의 고향이라고 할까요….

2013년 10월 15일 1100여 년 만에 중국 땅을 다시 밟았습니다. 석 달여 걸렸던 뱃길이 아닌 2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하늘 길로 눈 깜짝할 새 중국에 도착했습니다. 신라에서 당나라까지는 배로 1500리, 다시 걸어서 수도인 시안(장안)까지 3000리를 가야 하는데, 무려 3개월이나 걸리는 먼 길입니다. 전남 영암이라는 곳에서 김가기, 최승우와 함께 중국으로 가는 무역선인 상선을 타고 갔습니다. 868년 12세의 나이에 머나먼 중국 땅으로 유학을 떠난 이유는 6두품 집안이라 신분의 한계를 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6두품 계급으로 사회진출을 하려면 스님이 되든지, 유학을 가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은 ‘조기 유학’이라고 하지만, 신라시대 때와 상황은 다르겠죠.

예나 지금이나 나라의 힘이 강해야 백성들이 평안하게 지낼 수 있다는 진리는 변함이 없겠죠. 지금의 대한민국은 통일신라 때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부국강병해진 것 같습니다. 남·북한 둘로 나눠진 것이 안타깝지만요.

당나라 시절 장안은 인구 100만 명의 대도시로 동서 문물의 중심지 역할을 맡아 신라인을 비롯한 각국의 유학생과 상인들로 붐볐습니다.

아버지는 ‘십 년 공부에 과거 급제 못하면 아들이라 하지 말라’고 하면서 유학을 보냈습니다. 저는 남이 백을 하는 동안 천의 노력을 다해 유학 6년 만에 빈공과(賓貢科·외국인을 상대로 실시한 과거) 장원급제를 했습니다. 상투머리 끝을 천장에 감아 놓고 바늘 침으로 다리를 찔러 가며 밤 새워 글공부를 했었지요. 그리고 2년간 낙양(洛陽)을 유랑하면서 시작(詩作)에 몰두했고, 그 뒤 876년 당나라의 선주(宣州) 율수 현위(종9품)가 됐습니다. 21세에 박학굉사과(博學宏辭科·현직 관료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시험)에 응시하고자 현위의 직을 그만두고 입산해 학문에 전념코자 했으나, 의식주 문제가 어려워 다시 출사할 수밖에 없었죠. 황소의 난이 일어난 지 5년 후(880년)에 양저우에서 절도사 고병(高騈)의 휘하 종사관이 됐습니다.

중국 장쑤(江蘇)성 양저우(揚州)시는 중국 최대의 상업도시로 수양제가 200만 명을 동원해 건설한 대운하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합니다. 나의 중국 시절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기도 하지요. 20세 때 맡았던 첫 관직인 율수 현위 이후 두 번째 발령지이며, 계원필경과 토황소격문을 이곳에서 썼지요.

양저우시를 잠깐 거닐었습니다. 예전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인민정부 앞 8차선 도로 이름이 ‘문창로’라고 되어 있군요. 나를 기리는 의미일까요. 양저우는 금·은 가공기술과 칠기 제작기술이 발달해 진상품과 수출품으로 인기가 많았습니다. 또 비단류의 고급 옷감을 생산, 어의를 제작하기도 했지요. 이런 사실은 계원필경에 기록돼 있습니다.

1000년이 더 지났는데도 내가 머물렀던 양저우의 당성(唐城)이 그대로 보존돼 있습니다. 가파른 계단에는 경주 최씨 방문단을 환영한다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습니다. 성곽에 올라 탁 트인 양저우 전경을 바라봅니다. 영혼이 살아 숨 쉬는 듯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수서호의 물줄기도 보이는군요. 당성은 당시 회남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절도사 고병(高騈)의 주둔지입니다. 나는 그의 휘하에서 표(表)·장(狀)·서계(書啓)·격문(檄文) 등을 제작하는 관역순관(館驛巡官)을 맡았습니다. 당시 당나라는 정치 혼란과 계속되는 흉년으로 황혼기에 접어들어 난세였습니다.

산동 지역에서 시작된 황소의 난은 당나라 전역을 휩쓸고 수도 장안을 점령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때 내가 ‘격황소서(檄黃巢書)’로 황소의 무릎을 꿇게 했습니다.

‘천하의 사람이 모두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 뿐 아니라 아마 땅속의 귀신까지도 너를 죽이려고 은밀히 의논했을 것이니, 네가 비록 숨은 붙어 있다고는 하지만 넋은 이미 빠졌을 것이다’라고 썼는데, 그가 이 격문을 읽고 깜짝 놀라 의자에서 떨어졌다고 하더군요. 나는 이런 공로로 중국 황제로부터 자금어대(정5품 이상에게 하사하는 붉은 주머니)를 받기도 했었죠.

또 나는 이곳에서 약 5년간 근무를 하면서 많은 시와 문장을 썼고, 신라에 귀국해 계원필경이라는 문집을 냈습니다. 계원필경의 제목은 모래를 헤쳐 금을 찾는 마음으로 계원집(桂苑集)을 이루었고, 난리를 만나 융막(戎幕)에 기식하며 생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필경(筆耕)으로 제목을 삼았습니다.

이곳 당성에 나를 기리는 ‘최치원 기념관’이 지난 2007년에 건립돼 매년 10월 15일 제향행사를 한다고 하니 감격스러울 따름입니다. 동상과 흉상이 세워져 있으며, 계원필경 등 나의 유품 30여 점이 전시돼 있습니다.

특히 올해 10월 15일은 ‘천년을 뛰어넘는 기억’을 주제로 기념관 2층에 사료관을 개관하는 날이라며 최양식 경주시장, 구상찬 주(駐)상하이 한국총영사, 치샤오샤(祁小夏) 양저우 부시장, 최염 중앙종친회 회장, 최광주(광득종합건설 회장) 경남종친회 회장 등 20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치샤오샤 부시장은 “양저우는 최치원의 제2 고향이며 기념관은 중국 중앙정부가 최초로 허가한 외국인 기념관으로 한·중 문화교류의 중심축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것”이라고 축하 인사를 합니다.

광차오훼이 기념관 관장은 “우리 당대를 넘어 후대에까지 중국과 한국, 또 양저우와 한국, 양저우와 경주 간 대대손손 이어지는 우호적 관계를 만들어가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를 하네요.

개관식에 이어 제향행사가 시작됐습니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후손들의 제례를 받으니 기분이 묘해지더군요. 그래서인지 이날은 갑자기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등 날씨도 요상하군요.

경남에서 온 10여 명의 후손들을 이곳에서 만났습니다. 회장인 최광주 씨는 “중국에는 이렇게 훌륭한 기념관이 있는데, 한국에는 이렇다 할 기념관조차 없어 역사문화 보존과 계승에 너무나 무심하지 않느냐”고 지적했고, 최강건 씨는 “중국 시진핑 주석이 한·중 정상회담 때 나의 시 ‘범해’를 인용해 할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에 홀로 마음이 숙연해져 큰절을 올렸다”고 했습니다.

행사가 끝난 후 양저우대학에서 ‘제3차 고운 국제학술대회’가 열렸습니다. 일본 법정대학의 최상용 교수, 일본 시마네 현립대학교 이이다 다이조 교수, 남서울대학교 데이비드 메이슨 교수, 전 중국 섬서성 사회과학원 번광춘 교수 등 11명이 주제 발표를 했습니다. 양저우대학에는 한국어과가 개설돼 있군요.

당성에 머물면서 한 번씩 거닐던 수서호 풍경구로 향했습니다. 수양제가 항저우의 서호를 본떠 만든 것이라고 하는데, 양저우 외곽에 창장의 물을 끌어들여 인공호수를 만들고 그 호반 위에 정원과 숲을 조성했습니다. 능수버들과 복사꽃, 살구꽃이 늘어져 있는 수서호는 많은 홍교(虹橋)로 연결돼 있고 주변에는 원림(園林), 정자, 누각, 탑 등이 한데 어우러져 배를 타고 물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면서 경치를 감상하는 맛이 일품입니다.

내가 첫 관직을 맡았던 율수현의 영수탑에도 나의 초상화와 함께 시가 전시돼 있습니다. 또 2000년 10월 16일 나의 동상 제막식도 있었습니다. 양저우의 중학교는 역사시험 문제에 내가 자주 등장하고, 이곳에 사는 화가 축리 씨는 나만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합니다.

나는 884년 가을 귀국길에 오르기까지 16년 동안 당나라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동안 고운(顧雲)·나은(羅隱), 두순학 등 당나라의 여러 문인들과도 사귀었습니다. 이처럼 중국으로 유학 가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신라인이라는 뿌리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변방의 외국인으로서 고독과 소외를 견디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귀국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당 황제 희종에게 귀국의 뜻을 알리자 나를 당의 사신으로 삼아 예방의 형식으로 신라에 갈 수 있도록 주선해줬습니다. 고병은 나의 귀국을 너그럽게 이해하고 여비를 하사했으며, 군함으로 해변까지 배웅을 나왔습니다. 다음 해 봄 3월에 신라에 도착했죠.



◆시 한수로 읽는 최치원

당나라는 신라 유학생만 800여 명에 달할 만큼 각국에서 많은 유학생이 몰렸다고 한다.

최치원은 12세에 조기 유학해 국립교육기관인 국자감이 14세 이상으로 제한해 입학할 수 없어 장안의 명사인 승상 댁에서 심부름하면서 공부했다고 한다.

어느 날 승상이 최치원에게 시를 써보라고 하자 단번에 ‘추야우중(秋夜雨中)’을 써보였다고 한다.

‘秋風惟苦吟(추풍유고음) 가을바람에 괴로이 읊조리나/ 世路少知音(세로소지음) 세상에 알아주는 이 없네/ 窓外三更雨(창외삼경우) 창 밖에 밤 깊도록 비만 내리는데/ 燈前萬里心(등전만리심) 등불 앞에 외로운 마음 만 리 밖을 내딛네/

승상이 감탄을 하며 앞으로 다른 일 말고 글공부만 하라고 해 시작에 몰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전설로 읽는 최치원

중국 역사서에는 1100년 동안 대대로 전해져 오는 한 전설이 있는데, 이른바 ‘쌍녀분’이다. (사진)

두 처녀와 청년 관리 최치원의 이야기다. 양자강 남쪽 고순현(高淳縣)에 접어들어 넓은 들녘을 ‘치원교(致遠橋)’로 건너가면 ‘쌍녀분’이 나온다.

최치원은 지역 순방 중 여관에 투숙할 일이 있었는데, 여관 앞에 커다란 묘지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쌍녀분의 주인공은 부모님이 맺어준 강제결혼을 피해 자살한 16세, 18세 장(張)씨 자매였다.

최치원은 그들을 위로하는 시(詩)를 지었고, 이에 감동한 혼령들이 최치원이 묵고 있는 객사를 찾아와 회포를 풀었다는 이야기다. 1100년 전 이승과 저승을 넘나든 사랑의 전설인 것이다.
 

글·사진= 이종훈 기자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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