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해운대 동백섬 정상에 세워져 있는 최치원 동상. 오른쪽 나무 뒤로 해운정이 보인다.
함양태수로 부임했을 때 조성한 상림숲.
하동 진감선사대공탑비.
창원 월영대. 추모비가 있는 비각은 공사 중이다.
합천 홍류동 제시석.
낙동강이 한눈에 보이는 양산 임경대.
경남신문과 함께 나의 행적을 더듬어봤습니다. 문중 후손과 역사학자 등 여러분들을 만났습니다. 경남은 마지막 여생을 보낸 곳으로 나의 흔적이 다른 지역에 비해 상당히 많은 것 같습니다. 창원(월영대, 고운대, 청룡대, 강선대, 서원곡), 하동(쌍계사 앞 석문과 진감선사대공탑비, 환학대와 불일폭포, 범왕리 푸조나무와 세이암), 합천(가야산 홍류동 제시석과 농산정, 해인사 묘길상탑과 학사대, 고운암, 매화산 청량사), 함양(상림, 학사루), 양산(임경대, 경파대) 등 주요 유적지만 20여 곳이네요.
하지만 문화적인 자산으로 다듬어지지 않아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중국과 부산 등 다른 지역에서 실시하고 있는 현양사업을 참고해 경남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생각해봤습니다. 나에 대한 현양사업을 당사자가 이야기하는 게 부끄럽지만 경남의 문화자산을 업그레이드시킨다는 생각으로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유적지 복원과 보존사업이 이뤄져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고운대와 강선대의 위치 등을 고증을 통해 밝히고 이번에 보도한 나의 발자취를 따라 유적지 탐방 프로그램을 체계화하는 것입니다. 가깝게는 돝섬, 월영대, 무학산, 강선대, 청룡대를 탐방하는 프로그램을 만들면, 무학산 둘레길이 명상적 체험코스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존의 둘레길에 고운대 등을 넣고 나를 덧씌우면 큰 예산 들이지 않고 문화콘텐츠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넓게는 함양 상림과 하동 쌍계사, 합천 해인사, 양산 임경대 등을 탐방 프로그램에 넣어 도내 전역을 둘러보는 것입니다.
인물 마케팅 사업도 추천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국 양저우처럼 기념관이 필요합니다. 월영대와 관련해서는 매립해 버린 바다를 원상복구시킬 수도 없고, 주변 건물을 매입해 별서까지 만드는 것은 무리인 것 같습니다. 따라서 현재의 월영대는 그대로 보존해 주변에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신에 마산만이 잘 보이는 곳(돝섬, 만날고개, 가포, 해양신도시 등)에 별서와 월영대를 포함한 기념관을 건립해 예향 창원의 문화예술 관광브랜드로 개발하는 것입니다.
인근 부산 해운대구의 경우 10여 년 전에 최치원 유적지 성역화를 시작해 해운대가 있는 동백섬 정상에는 나의 동상과 시비가 세워져 있고, 팔각정인 해운정도 세웠습니다. 또 매년 나를 기리는 추념 헌공다례제를 하고 시낭송, 국악공연, 가훈쓰기, 다도배우기 등 전통문화 체험마당을 펼치는 등 세계적인 관광지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또 지난 10월 19일에는 해운대해수욕장 일원에서 '제1회 고운 최치원 문화축전'을 열어 한글붓글씨 대회도 개최했습니다.
나의 흔적이 가장 많은 경남, 특히 창원은 이런 행사가 없어 아쉬웠습니다. 경남은 나의 일생에서 아주 중요한 곳이므로 스토리텔링화하여 다양하게 문화콘텐츠 사업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월영대는 내가 잠시 머물다 간 간이역이 아니라 나의 학문과 자연사랑, 인간사랑의 사상과 철학이 숨 쉬는 역사의 현장입니다. 따라서 현양사업을 통해 창원이 학문과 문학의 산실임을 널리 알리고, 문화 정체성 확립과 지역사회의 발전에 활용을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최근 창원에서 나를 기리기 위한 기념사업회가 추진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사업회를 중심으로 중국 양저우에서가 아니라 경남, 창원에서 문화콘텐츠의 옷을 입고 화려하게 부활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경남신문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이종훈 기자 leejh@knnews.co.kr
최치원이 남긴 경남의 발자취 재조명하자
박동백 창원문화원장
최치원이 경남지역에 남긴 유적지(遺蹟址)는 얼마나 되며, 그를 연구하는 데 사료적 가치가 있는 곳을 밝혀 놓아야 되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 여겨진다.
경남에서 벼슬한 곳은 서기 897년(진성왕 11년)에 함양태수로 부임한 바가 있고, 그외 가장 많은 행적을 남긴 곳은 합천군 해인사이며, 그가 말년에 가족과 더불어 조용한 바닷가에 살고자 한 곳은 오늘의 창원시 마산 합포구 해운동(海雲洞)임은 삼국사기에서 밝혀 놓고 있다.
그외는 사산비명(四山碑銘)을 쓰게 된 쌍계사의 진감선사비, 진해 용원의 청룡대, 진해의 강선대, 마산 두척산의 고운대 그리고 부산의 해운대 등을 들 수 있다.
고운 최치원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벼슬도 버리고 가족을 데리고 조용히 살기 위해 잔잔한 호수와 같은 마산 합포 돝섬이 보이는 바닷가에 월영대(月影臺)를 축조하고, 농사를 겸할 수 있는 별장인 별서(別墅)를 지어 살고자 했다(삼국사기). 그런데 왜 해인사로 망명했을까?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0권 합천군 편 '산천조'에 "고려 태조가 일어날 무렵에 최치원(崔致遠)이 글을 올렸는데 계림은 황엽(鷄林黃葉) 곡령(鵠嶺:개성)은 청송(靑松)이라 하였다. 이로 인하여 신라왕이 미워하므로 최치원은 가족을 데리고 해인사(海印寺)에 숨었다"고 했다.
후세에 많은 사람들이 계림황엽 곡령청송, 즉 고려는 일어나고 신라는 망한다는 이 글을 어디에서 썼겠는가에 의문을 갖는 사람이 있지만, 이 글은 고운이 여생을 보내려고 오늘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해운동에 정착하려 했는데 계림황엽의 시구가 신라왕실로부터 미움을 사서 해인사로 망명했다 하니 이 시는 월영대에서 작성한 시로 풀이할 수 있다.
해인사로 망명한 고운은 홍류 10리길 중간에 농산정 앞 절벽바위에 제시석(題詩石) 글을 남겼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합천군 편 고적조에 "狂噴疊石吼重巒(광분첩석후중만) 人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 常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 고교유수진농산(故敎流水盡籠山)"이라고 되어 있다.
이를 풀이하면 "첩첩한 돌 사이로 미친 듯이 쏟아지는 물소리, 겹겹한 산을 두드리니 사람의 말소리는 지척간에서도 분간하기 어렵다. 항상 시비의 소리가 귀에 들릴까 두려워서 일부러 흐르는 물을 시켜 산을 모두 덮었네"이다.
여기에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창원시 진해구 청룡대(靑龍臺)에는 치원락(致遠樂)이란 낙관이 있고, 해인사 길상탑 원문에도 치원서란 낙관이 다 있는데, 망명 후의 기록에는 낙관이 없는 것은 아마도 그의 행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고적조 합천 해인사 편에 독서당(讀書堂)에 대하여 "세상에 전해오는 말에는 최치원이 가야산에 숨어 살았는데 하루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서 문밖에 나갔더니 갓과 신을 숲 사이에 버려두고 간 곳을 몰랐다. 치원이 간 그날이 오면 절의 스님이 명복을 천도하고 유상(遺像)은 독서당(讀書堂)에 남겨 두었다. 당(堂)은 절 서쪽에 있다" 하였다.
김일손(세조 10~ 연산군 4년)이 해인사를 찾았을 때 조법사가 절을 수리하고 있었는데, 독서당을 물었더니 모른다고 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
그러나 여기에서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절 서쪽이라 하였으니 오늘의 해인사 대적광전 서편 학사대(學士臺)가 있는 곳으로 천년의 전나무가 있다. 이를 후세 사람들은 최치원의 지팡이를 꽂아둔 것이 자라 고목이 되었다고 한다.
최치원이 돌아가고 1023년 고려 현종 14년에 고려가 일어남을 최초로 예언해 준 최치원에게 문창(文昌)이란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이후 창원사람들은 고운의 시호를 따서 이 지역을 문창이라 부르기도 하고 문창제놀이, 문창학교, 문창교회 등 최치원의 시호를 활용하는 사례가 많다.
앞으로 문창후(文昌侯) 최치원을 연구하기 위해선 창원과 해인사의 유적지를 재조명하여 고운의 역사 복원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스토리텔링 소재 풍부한 '창원'을 주목하라
노성미 경남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최치원'과 '월영대'는 창원의 문화자산 중에 역사적, 문화적으로 가장 가치 있는 것이다.
최치원의 출생지, 유람처, 그가 남긴 시문과 비명 등은 최치원 문화콘텐츠 생성의 가장 중요한 원천소재이다. 창원은 이들 원천소재를 풍부하게 갖추고 있다.
하나는 최치원의 출생지로서의 창원이고, 둘째는 월영대나 고운대 같은 최치원 유적지, 셋째는 월영대 시이다.
최치원의 가계에 대해 '삼국사기'는 '경주 사량부 사람'이라 했고 '삼국유사'는 '본피부 사람'이라 기록하고 있다. 또 전설이나 소설 '최고운전'에 근거하여 군산 출생설, 창원 출생설 등이 제기되고 있다. 위대한 문장가이자 학자이고 문묘에 배향된 최치원의 출생지가 이렇게 분명하지 않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에 "그의 집안 내력은 알 수 없다"고 했다. 최치원의 제자 중에 고려의 중앙귀족이 많았고, 도선국사와 함께 고려의 호국신의 지위에까지 오른 최치원의 집안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된다. 그의 출생지가 이렇게 분명하지 않다는 것은 설화나 소설에서 전하듯이 그가 경주 출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도 경주 남산을 그의 유람처로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그가 경주가 아닌 지방의 이름 없는 집안 출신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유추해볼 수 있다. 거기에 합포현 별서를 연결시켜 보면 인과성이 드러난다.
최치원이 자유로운 몸이 되어 산과 숲속이나 강과 바닷가에 대와 정자를 만들고 솔과 대를 심으며 서적을 많이 쌓아 놓고 자연을 노래하며 살았다고 했는데, 경주 남산, 강주 빙산, 협주 창양사, 지리산 쌍계사, 합포현 별서 등으로 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합포현 별서'는 기록이다. 다른 지역은 산이나 절인데, 합포는 별서라 되어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지난 9월 마산문화원에서 주최한 '고운 최치원 학술심포지엄'에서 '별서'가 사람이 숙식을 할 수 있는 농장에 달린 '별장'의 개념이며, 우리나라 기록상 가장 오래된 별장 관련 기록이 '최치원'의 '합포현 별서'라고 발표되었다. 창원 월영대는 최치원의 별장에 근거하여 지어진 대의 이름이라 가정할 수 있다. 이 문제는 학술적 고증을 거쳐 더 구체적으로 검증되어야 할 중요한 문제다.
다음으로 중요한 원천소재는 월영대 시이다.
월영대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걸쳐 정지상, 김극기, 정이오, 이황 등 당대 최고의 문인 학자들의 유람처이며 그들의 필적이 있는 곳이다. 고려의 원 지배기에는 합포에 정동행성이 설치되어 군사적 요충지가 된 이후 이곡, 전녹생, 이색, 정몽주 등 많은 문인들이 합포로 부임하는 사람들을 보내면서 시문을 지었는데, 이들 전별시에 월영대와 최치원이 등장한다. 조선 초기에는 서거정, 김종직 등 많은 사람들의 시문이 있다. 월영대는 시인, 학자라면 성지순례를 하듯이 들러야 하는 곳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월영대는 '달그림자'를 완상하는 대이다. 최치원이 노닐었던 월영대가 갖는 의미를 후대의 시인들이 지속적으로 환기하고 있다. 시인들은 최치원의 행적을 더듬고 월영대를 찾아 달그림자와 또 달그림자를 바라보는 누대를 통해 스스로의 위상을 확인하려 하고 있다. 이것이 월영대 시의 특징이다. 이것은 월영대가 지닌 속성이면서 월영대 시에서도 이러한 인식은 시대가 바뀌어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 의미들을 바탕으로 하여 월영대 시를 의미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최치원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서는 이들 원천소재에 다시 집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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