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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은 자유시였지만, 결국 다른 길을 택했다. 시조시인 이우걸과 연출가 이윤택의 이야기다.
자유시를 배우던 문청 이우걸은 돌연 시조로 등단, 한국의 대표적인 시조시인이 됐다. 한국 연극판 최고 자리인 국립극단 예술감독을 역임한 이윤택도 연극보다 시와의 만남이 먼저였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에겐 ‘시적이다’는 수식어가 곧잘 붙는다. ‘시적인 시조’를 쓰는 이우걸, ‘시적인 연극’을 만드는 이윤택.
김해시 생림면 도요마을 도요창작스튜디오 통유리 창가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현대시학 등단 선후배 사이인 둘은 1970년대 문단 이야기로 대화의 물꼬를 텄다. 그러다 예술의 본질을 논하고, 미래의 계획까지 도모한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로, 물 흐르듯 이어지는 대화는 자연스러웠다.
◆인연
둘의 인연은 지난 2007년 밀양에서 시작됐다.
밀양교육장 이우걸과 밀양연극촌 총감독 이윤택으로의 대면이었다.
첫 만남이었지만 1970년대 같은 잡지로 등단한 두 사람은 이미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대화는 길어졌고, 이 만남을 계기로 서로에게 특별한 인연이 된다.
먼저 이우걸은 이윤택 감독이 시인으로 돌아오는 길을 안내했다. 문학 계간지 ‘서정과 현실’(2008년 상반기호)에 소시집을 낼 것을 제안한 것이다.
이우걸은 “시적 감성이 없이는 좋은 연극이나 작곡을 제대로 하지 못해요. 이 감독의 연극을 보면서 좋은 시 정신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시를 안 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 신작시 15편을 써보라고 권했죠”라고 말했다.
시를 잊고 살던 이윤택은 이를 계기로 다시 시를 쓴다.
“8년간 시를 잊고 지냈고, 당시 아무도 나를 시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갑작스러운 제안으로 시를 쓰게 됐는데, 행복했습니다. 솔직히 연극보다 시를 먼저 시작했지만, 시를 안 쓰고 싶었어요. 외동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인지 혼자 골방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싫었거든요. 연극으로 방향을 바꾼 것도 사람들과 놀고 싶어서예요.(웃음) 그런데 이우걸 선생님의 제안을 계기로 서서히 시인으로 복귀 중입니다.”
인연은 또 한 번 이어졌다.
같은 해 이우걸의 시조집 ‘나를 운반해 온 시간의 발자국이여’ 출판기념회를 밀양연극촌에서 이윤택의 기획으로 개최한 것이다. 이우걸은 당시 출판기념회를 생애 최고의 선물로 기억한다.
“특별하고 도전적인 출판기념회였습니다. 연극배우 5명과 이 감독이 직접 출연했고 한 젊은 배우가 시조를 랩으로 낭송했습니다. 관객들의 앙코르를 받았죠. 내 시조가 다른 장르로 공연되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었고, 잊을 수 없는 감동이었습니다.”
◆향가, 그리고 시와 연극
이윤택은 이우걸의 시조에 대해 자신이 추구하는 연극과 맥이 통한다고 했다.
“이우걸의 시조는 향가적입니다. 시조라고 보기에는 너무 자유롭고 현대시라고 보기에는 단아한 눈에 안 보이는 형태가 있지요. ‘팽이’의 경우 정신이 사물화되는 것, 한 영혼이 물질화되는 시로 읽었습니다. 형태 이전에 이미지와 관통하는 시, 이것은 향가의 형태, 즉 진짜 시의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데뷔 때부터 나는 향가야말로 우리 시의 고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세히 보면 자보가 있는데 그냥 읽으면 없는 것처럼 읽혀지죠. 운율에 묶이는 시가 아닌 자유로운 정신의 시를 말합니다. 향가가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것은 그 영역이 굉장히 크기 때문입니다. ‘처용가’는 극시, ‘제망매가’는 서정시, ‘찬기파랑가’는 이미지시지요. 그래서 향가의 시대에는 시에 드라마, 연극, 이미지가 다 있습니다. 나는 지금도 향가를 추구하면서 연극을 만듭니다.”
이우걸이 답한다.
“자유시를 먼저 공부했고, 김춘수 선생에게 시를 배우면서 이미지화를 강조당했던 게 그렇게 느껴졌나 봅니다. 그 때문인지 나의 시조를 정통 시조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우리의 노래는 향가에서 고려가요로, 고려가요에서 시조로 어떤 원형을 찾아 흘러왔습니다. 시조는 그런 원형의 하나지요. 시조는 노래를 잃었지만 그 형식에서 음악성을 머금고 있습니다. 그것이 가락입니다. 시가 가락을 잃어버리면 시의 중요한 장점을 잃게 됩니다. 좋은 자유시도 가락을 가지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지요. 우리는 기마민족이기 때문에 말을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4·4조 3·4조가 되게 돼 있습니다. 시조의 형식이 억지로 만든 것은 아니라는 거죠.”
이윤택은 향가성을 잃은 현대시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100년이나 200년 후에 지금 20세기의 시를 평가한다면 서구문학과 섞인 사이비 혼잡문학 비슷하게 평가받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시의 원형은 향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근대시부터는 말을 이상하게 바꾸는 것이 유행처럼 됐죠. 우리말에는 관계사, 수동태가 없습니다.”
이우걸이 공감하며 말을 덧붙인다.
“한국시가 가야 할 방향이 향가라는 데 공감합니다. 절절한 감성, 사물을 느끼는 감정, 영혼이 바로 각인되는 시가 좋은 시죠. 우리나라는 향가에서 고려가요, 시조로 이어지다가 일제 치하에 서양시를 배워와서 신시가 생겼습니다. 그냥 놔뒀어도 자유시가 나왔을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에게 더욱 맞는 자유시가 나왔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지금 전통 단절시대를 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연이어 이우걸은 이윤택에게 가졌던 선입견을 고백하며, 그의 연극을 이야기한다.
“사실 예전에는 이윤택이 굉장한 자유주의자, 전통이 싫어서 온갖 실험을 다 하는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해체시의 선두주자에 문화게릴라라는 인상이 깊었기 때문이겠죠. 그러다 이 감독의 연극을 보게 되면서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윤택의 햄릿을 봤는데, 원 대본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한국적 전통연희의 소리, 가락, 몸짓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어 독창적이면서도 보편적 공감에 이르게 하는 데 감동이 있었습니다. 전통성에 대한 시각이 남다르다는 것을 느꼈죠. 향가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런 전통성이 연극에 영향을 미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시조의 원형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현대의 여러 양상을 담아내 살아 있는 시를 만들려는 내 생각이 이윤택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이에 이윤택은 최근 자신의 작업 이야기를 풀어낸다.
“요즘 제 연극적인 꿈이 향가를 주회하는 것입니다. 준비 중인 ‘꽃을 바치는 시’는 향가 헌화가를 소재로 만든 희극이고, 앞서 처용가를 ‘아름다운 남자’라는 희곡으로 써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향가를 연극으로 끄집어내서 작업하고 있는 거죠. 시를 연극으로 빼먹겠다는 심보죠.(웃음) 누군가 이윤택은 시인의 상상력으로 연극계를 평정했다고 말했는데, 맞습니다. 저는 시와 극을 잘 연결시킬 수 있는 단서가 향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약속
대화가 끝날 무렵 이윤택이 문학의 지방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지방성에 대한 새로운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는 연극이나 문학에 유파가 없습니다. 제 생각에 예술이란 편견입니다. 자기 스타일이 있어야 하는 거죠. 요즘 그런 유파가 없는 것이 오히려 안타깝지요. 저는 경상도에 조정권, 이하석, 이우걸, 고정희, 최성호 계열의 유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서와 이미지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쓰여지는 시를 쓰는 것이죠. 김해 도요에서 그 유파를 정리해 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김해에서 책을 내지만 이게 전국구로 평용될 수 있어야 열린 지역주의가 실현되는 것이죠.”
이우걸은 유파에 대한 견해에 “지금 지역, 특히 경상권에 좋은 시인이 많다”며 “그런 시인들의 유파를 만드는 것은 지역문학의 바탕이 되고 한국시사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환영했다.
그러자 이윤택이 대뜸 제안을 한다.
“한국현대시사를 ‘공무도하가’부터 새로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시를 전통화하는 시론이 아직 없잖아요. 김해 도요출판사에서 원론적 시론을 연재하고, 정제된 시를 내는 시 전문지, 계간지를 만들고 싶어요. 내년에 이우걸 선생님과 함께 이윤택, 최영철, 이하석 씨 등 경상도 중심으로 순수한 출판 기획 시리즈물을 내고 싶습니다.”
이우걸이 흔쾌히 약조한다.
“좋습니다. 좋은 멤버들끼리 진정성 있는 작업을 하는 것은 환영입니다.”
시조시인과 연출가, 표출하는 형식은 다르지만 좋은 예술작품은 본질적인 맥이 통한다는 결론을 남기고 두 사람은 내일의 또 다른 만남을 기약했다.
글= 조고운 기자 lucky@knnews.co.kr 사진= 김승권 기자 sk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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