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전시소식
97세의 노(老)화백이 처음으로 고향인 경남에서 전시회를 연다.
창녕 출신의 김보현 화백은 사흘에 한 번꼴로 신장 투석을 해야 함에도 미국 뉴욕에서 13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왔다. 전시회 준비를 위해 지난달 휠체어를 타고 경남도립미술관을 방문한 그는 다소 지친 모습이었지만 얼굴 표정은 밝았다.
전시를 기획한 이규석 경남도립미술관 학예사는 "몸이 편찮아서 한국에 못 올 줄 알았지만 '고향에서 열리는 전시회에 꼭 가고 싶다'는 김 화백의 의지가 컸다. 약 열흘 동안 아픈 몸을 이끌고도 고향인 창녕과 광주, 서울 등을 오가는 등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고 전했다.
김보현 화백은 1917년 창녕에서 3남 2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책을 보며 그림을 곧잘 그렸다. 화가였던 형(김창덕)의 영향도 컸다.
1937년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떠나 메이지 대학 법과에 입학했고 얼마 안 돼 태평양미술학교에도 들어갔다. 밤에는 메이지대학에 다니고 낮에는 태평양미술학교에 다니면서 그림을 약 2년 동안 배웠다. 태평양미술학교는 정식학교라기보다는 학원에 더 가까운 곳으로 이인성, 남관 등 우리나라 화가들이 많이 다녔다.
창녕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보현 화백. /김민지 기자
1944년 일본에서 전남 광주 출신의 아내(치과의사)를 만나 결혼을 했고, 해방 이듬해인 1946년 4월 일본에서 귀국해 광주에 정착했다. 김 화백은 조선대학교 예술학과(현 미술학과)에서 첫 번째 임용한 교수다. 하지만 교수로 재직하면서 좌익과 우익 모두에게 몰려 죽을 고비를 넘기는 등 심한 고초를 겪었다.
김 화백은 2006년 한 미술잡지와 인터뷰에서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났는데, 그때 영문도 모른 채 경찰에 잡혀갔다. 반란 혐의가 있는 공산주의자로 몰았다. 전기고문도 당하고 죽을 만큼 두들겨 맞았다. (중략) 6·25전쟁이 터졌다. 그때 나는 전쟁이 일어난지도 모르고 학생들과 함께 홍도로 사생여행을 떠났다. 어느 날 흑산도 경찰서에서 지서장의 지령장을 내보이며 '김보현이 홍도에서 학생들에게 공산주의 강의를 한다'며 유치장으로 끌려갔다"고 고백했다. 그 뒤에도 그는 광주에 주둔하던 미군 브라운 대령의 딸에게 미술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친미 반동으로 잡혀가 고생을 했다.
한국에 대한 정이 떨어졌을까? 그는 1955년 미국 일리노이대학의 교환교수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떠났다. 이후 넥타이공장에서 시간당 1달러 정도를 받고 그림을 그렸고 백화점 디스플레이를 하기도 했다. 1967년 한국인 부인과 이혼을 했고, 1969년 미국인 예술가 실비아 올드(Sylvia Wald·1915~2011)와 결혼했다. 김 화백이 한국화단에 알려진 것은 1995년 예술의전당 개인전, 2007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분관 회고전 부터다.
김 화백은 현재 미국 뉴욕에 살고 있으며 백수(白壽)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손에서 붓을 놓지 않는다. 최근 김 화백의 작업실을 방문했던 박상호 조선대 미술대학 교수는 "100호가 넘는 대형 캔버스를 주위 사람이 들고 휠체어를 탄 김 화백이 붓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작업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며 혀를 내둘렀고, 이규석 학예사도 "한국에 있는 동안도 끊임없이 스케치를 했으며 아이폰도 잘 사용하시더라. 미국으로 돌아가신 후 '고맙다'라는 메일을 받았다"고 전했다.
김보현 화백의 작품은 오는 8월 21일까지 경남도립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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