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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향기] 이병철 前 전국귀농운동본부 본부장
“귀농은 흙과 더불어 살며 생명밭·마음밭 일구는 것”
버스가 하루에 두 번밖에 안 다닌다는 함안군 산인면 입곡리 숲안마을. 이병철(60) 전 전국귀농운동본부 본부장을 만나기 위해 내비게이션을 이용해 찾아갔건만 마을 언저리에서 몇 번이나 헤맸다.
집에 도착하니 공부방으로 사용하는 한심정(閑心亭)에 매달린 풍경이 낯선 손님을 반기며 맑은 소리를 낸다. 건물 3동 중 살림집으로 사용하는 숲마루재는 친구와 후배들과 함께 지었으며 전국에서 모은 폐벽돌로 만들었다.
이 본부장은 “이 집은 지은 사람 모두의 공동의 집이고 다만 나는 이곳의 관리인이다”며 “누구나 원하면 묵을 수 있도록 개방돼 있다”고 설명했다.
▲어떻게 농민운동을 하게 됐나
초등학생 시절 읽었던 ‘상록수’는 이 본부장의 인생을 바꾼 몇 권의 책 중 하나다. 이 책을 보면서 많이 울었고 주인공처럼 농민운동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 본부장은 “사회의식보다는 농민들의 사랑과 헌신이 가슴에 와 닿았다”고 과거를 회상했다.
이 본부장은 부산대 국문과에 진학한 후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후 농민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대부분 동지들은 노동운동에 투신했지만 농민들이 이 시대에 가장 소외받는 계층이고, 농민의 역할이 가장 기본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인식이나 사회적 처우가 가장 열악하다는 생각에 고향인 고성에서 농민운동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 본부장은 경남지역에서 최초로 가톨릭농민회를 만들어 농민들이 생산한 농산물값이 제대로 보장받고 농민들이 우리 시대의 생명을 담당하는 사람으로 올바르게 대접받기 위한 권익 투쟁운동을 하게 됐다.
당시 전국 가톨릭농민회는 가장 전투적이고 진보적인 운동단체로 꼽히는 곳이었지만 그가 전국 가톨릭농민회 사무국장을 하면서 생명공동체 운동으로 바꾸어 나갔다.
▲생명공동체 운동이란 무엇인가
그는 농민운동을 하면서 농민들 또한 자본주의 경제 속에서 생명을 존중하고 기르고 돌보는 것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가 사라지고 단순히 농산품을 생산하는 계층으로 전락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농민이 농산물을 시장에 내다팔기만 하다 보니 수확 직전의 농산물에까지 농약을 쓰고 제초제를 함부로 사용하게 됐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따라서 그는 ‘참농민이 되어야 참세상을 살리는 것이다’는 인식하에 유기농 생산과 도농 직거래를 통해 생산물을 서로 연대하고 나누는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 본부장은 “농촌 문제는 농민들의 문제가 아니라 이 땅에서 밥 먹고 살아가는 모든 국민의 문제”라며 “국민운동으로 전개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우리농촌살리기 운동본부 기획실장을 맡았다”고 회고했다.
이 본부장은 우리농촌살리기 운동본부에서 도시에 있는 소비자 공동체가 농촌의 생산을 책임지고 농촌 생산 공동체는 도시의 밥상을 책임지는 도농 공동체 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이 운동은 도시와 농촌이 연대한다고 하더라도 농업을 이어갈 젊은 인력이 없다는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농업이 자기 자신과 세상을 모두 살린다는 확신 없이는 불가능하기에 농업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는 농업 주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1996년 200만명의 젊은이가 귀농하자는 ‘제2브나로드 운동’을 주창하게 된다.
▲왜 귀농인가
이 본부장은 “지난 1988년과 1989년 우리 사회의 활력이 가장 왕성했으며, 이때 농촌을 떠난 사람이 200만명이 넘는다”며 “농산물을 돈벌이 수단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생명의 가치를 생태적 삶 속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 삶의 자연성과 근원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자부심과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 200만명이 농촌으로 돌아간다면 농촌을 되살릴 수 있다는 판단을 했기에 귀농운동을 하게 됐다”고 피력했다.
귀농운동본부에서 운영했던 귀농학교를 수료한 사람 가운데 600~700명이 농촌 현장에 들어갔다. 그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90% 이상이 농촌에 정착해 있다. 일반 귀농자들의 70%가 다시 도시로 돌아오는 것에 비해 높은 수치이다.
이 본부장은 “귀농학교를 통해 농촌 현장으로 들어간 사람은 기본적으로 삶의 가치를 돈벌이보다, 편리함과 풍족함보다 더욱 중요한 게 있다는 걸 깨달은 사람이다”고 강조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귀농이란 단순히 농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행복에 대한 새로운 가치의 기준을 세우는 데서 출발하는,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삶의 생명의 근본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즉 물질적으로 불편하지만 정신적으로 충만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 흙과 더불어 사는 삶이라는 생태적 각성을 가진 후 귀농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자연인 이병철
이 본부장은 지난해 3월 전국귀농운동본부 본부장에서 물러났다. 그는 텃밭에서 농사를 지으며 수십년간 해온 운동에 대해 되돌아보면서 사회적 변화를 추구하는 일보다는 자신의 성찰과 내면적 변화에 관심을 두고 있다.
고향이 아닌 함안에 정착한 계기가 궁금해졌다.
이 본부장은 “자연과 함께 삶을 살고자 했지만 고향 마을에 고속도로가 생겼고, 시골에 농사 기반도 없었기에 지리산쪽을 찾아 헤매다가 땅값이 너무 비싸 아내의 직장(마산대)과 가까운 숲안 마을에 10년 전에 자리 잡게 됐다”며 “이름처럼 숲이 무성하지는 않지만 공장이나 오염원이 없는 곳이며, 사람이 떠나갔던 농촌 마을에 다시 푸른 꿈을 품은 젊은이들이 돌아오면 그때는 사라졌던 숲도 새롭게 복원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을 이었다. 그는 “현재 텃밭에서 재배하는 것은 찾아오는 사람들의 끼니를 대접할 수 있는 벼와 채소뿐이다”며 다른 곳에 가면 농사를 짓고 있다는 말을 하기도 부끄럽단다.
▲지금의 관심사는
이병철 본부장의 화두는 ‘마음’이다. ‘자연인’ 이병철 본부장은 지난해 9월에 개교한 지리산 마음학교(cafe.daum.net/jirisanmaum, ☏ 070-8867-0680) 교장을 맡았다. 이곳은 귀농인, 시민, NGO 활동가, 청년들을 위한 마음공부의 장이다.
앞장서지 않겠다는 그가 다시금 속세로 등장하게 된 계기는 뭘까.
이 본부장은 “10여 년 이상 마음공부를 해왔지만 아직도 그 부분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에 처음에는 교장을 맡아달라는 권유를 거절했다”며 “후배들이 여러 차례 찾아와 세상을 바꾸려면 사람들의 마음을 바꿔야 하지 않겠냐고 부탁해 승낙하게 됐다”고 배경을 언급했다. 물론 그 역시도 수행법이나 마음공부법의 사회화와 보편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이미 하고 있었다.
그는 “지리산 마음학교에서는 가르치고 배우는 것보다는 함께 길을 찾아나간다”며 “종교와 문파를 넘어서 지구를 다녀간 성자들의 가르침 가운데 핵심적인 공통 가르침을 바탕으로 공부하고 자신을 포함해 모든 존재 안에 신성이 있다고 믿고 그에 따라 듣고 보고 말하고 행동하도록 하는 데 관심이 있다”고 밝혔다.
지리산 마음학교는 ‘참나의 쉼’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몸은 물론이고 마음과 정신까지 쉬면서 생명력을 재충전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
이 밖에도 그의 집에서는 만 5년째 물처럼생명평화학교 강의가 이어진다. 생명평화탁발순례단이 2004년 7월 마산, 창원, 진해 지역을 순례하면서 만난 인연을 바탕으로 시작했으며 매월 셋째 주 토요일 저녁에 모임을 가지며, 바가바드기타(힌두경전), 구르지혜프에 이어 지금은 해월 최시형 선생의 사상을 공부하고 있다.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여가 가능하다. 평화로워지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언제든 열려 있는 공간인 셈이다.
출처: 경남신문, 글=권태영기자
“귀농은 흙과 더불어 살며 생명밭·마음밭 일구는 것”
버스가 하루에 두 번밖에 안 다닌다는 함안군 산인면 입곡리 숲안마을. 이병철(60) 전 전국귀농운동본부 본부장을 만나기 위해 내비게이션을 이용해 찾아갔건만 마을 언저리에서 몇 번이나 헤맸다.
집에 도착하니 공부방으로 사용하는 한심정(閑心亭)에 매달린 풍경이 낯선 손님을 반기며 맑은 소리를 낸다. 건물 3동 중 살림집으로 사용하는 숲마루재는 친구와 후배들과 함께 지었으며 전국에서 모은 폐벽돌로 만들었다.
이 본부장은 “이 집은 지은 사람 모두의 공동의 집이고 다만 나는 이곳의 관리인이다”며 “누구나 원하면 묵을 수 있도록 개방돼 있다”고 설명했다.
▲어떻게 농민운동을 하게 됐나
초등학생 시절 읽었던 ‘상록수’는 이 본부장의 인생을 바꾼 몇 권의 책 중 하나다. 이 책을 보면서 많이 울었고 주인공처럼 농민운동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 본부장은 “사회의식보다는 농민들의 사랑과 헌신이 가슴에 와 닿았다”고 과거를 회상했다.
이 본부장은 부산대 국문과에 진학한 후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후 농민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대부분 동지들은 노동운동에 투신했지만 농민들이 이 시대에 가장 소외받는 계층이고, 농민의 역할이 가장 기본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인식이나 사회적 처우가 가장 열악하다는 생각에 고향인 고성에서 농민운동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 본부장은 경남지역에서 최초로 가톨릭농민회를 만들어 농민들이 생산한 농산물값이 제대로 보장받고 농민들이 우리 시대의 생명을 담당하는 사람으로 올바르게 대접받기 위한 권익 투쟁운동을 하게 됐다.
당시 전국 가톨릭농민회는 가장 전투적이고 진보적인 운동단체로 꼽히는 곳이었지만 그가 전국 가톨릭농민회 사무국장을 하면서 생명공동체 운동으로 바꾸어 나갔다.
▲생명공동체 운동이란 무엇인가
그는 농민운동을 하면서 농민들 또한 자본주의 경제 속에서 생명을 존중하고 기르고 돌보는 것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가 사라지고 단순히 농산품을 생산하는 계층으로 전락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농민이 농산물을 시장에 내다팔기만 하다 보니 수확 직전의 농산물에까지 농약을 쓰고 제초제를 함부로 사용하게 됐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따라서 그는 ‘참농민이 되어야 참세상을 살리는 것이다’는 인식하에 유기농 생산과 도농 직거래를 통해 생산물을 서로 연대하고 나누는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 본부장은 “농촌 문제는 농민들의 문제가 아니라 이 땅에서 밥 먹고 살아가는 모든 국민의 문제”라며 “국민운동으로 전개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우리농촌살리기 운동본부 기획실장을 맡았다”고 회고했다.
이 본부장은 우리농촌살리기 운동본부에서 도시에 있는 소비자 공동체가 농촌의 생산을 책임지고 농촌 생산 공동체는 도시의 밥상을 책임지는 도농 공동체 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이 운동은 도시와 농촌이 연대한다고 하더라도 농업을 이어갈 젊은 인력이 없다는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농업이 자기 자신과 세상을 모두 살린다는 확신 없이는 불가능하기에 농업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는 농업 주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1996년 200만명의 젊은이가 귀농하자는 ‘제2브나로드 운동’을 주창하게 된다.
▲왜 귀농인가
이 본부장은 “지난 1988년과 1989년 우리 사회의 활력이 가장 왕성했으며, 이때 농촌을 떠난 사람이 200만명이 넘는다”며 “농산물을 돈벌이 수단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생명의 가치를 생태적 삶 속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 삶의 자연성과 근원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자부심과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 200만명이 농촌으로 돌아간다면 농촌을 되살릴 수 있다는 판단을 했기에 귀농운동을 하게 됐다”고 피력했다.
귀농운동본부에서 운영했던 귀농학교를 수료한 사람 가운데 600~700명이 농촌 현장에 들어갔다. 그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90% 이상이 농촌에 정착해 있다. 일반 귀농자들의 70%가 다시 도시로 돌아오는 것에 비해 높은 수치이다.
이 본부장은 “귀농학교를 통해 농촌 현장으로 들어간 사람은 기본적으로 삶의 가치를 돈벌이보다, 편리함과 풍족함보다 더욱 중요한 게 있다는 걸 깨달은 사람이다”고 강조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귀농이란 단순히 농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행복에 대한 새로운 가치의 기준을 세우는 데서 출발하는,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삶의 생명의 근본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즉 물질적으로 불편하지만 정신적으로 충만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 흙과 더불어 사는 삶이라는 생태적 각성을 가진 후 귀농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자연인 이병철
이 본부장은 지난해 3월 전국귀농운동본부 본부장에서 물러났다. 그는 텃밭에서 농사를 지으며 수십년간 해온 운동에 대해 되돌아보면서 사회적 변화를 추구하는 일보다는 자신의 성찰과 내면적 변화에 관심을 두고 있다.
고향이 아닌 함안에 정착한 계기가 궁금해졌다.
이 본부장은 “자연과 함께 삶을 살고자 했지만 고향 마을에 고속도로가 생겼고, 시골에 농사 기반도 없었기에 지리산쪽을 찾아 헤매다가 땅값이 너무 비싸 아내의 직장(마산대)과 가까운 숲안 마을에 10년 전에 자리 잡게 됐다”며 “이름처럼 숲이 무성하지는 않지만 공장이나 오염원이 없는 곳이며, 사람이 떠나갔던 농촌 마을에 다시 푸른 꿈을 품은 젊은이들이 돌아오면 그때는 사라졌던 숲도 새롭게 복원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을 이었다. 그는 “현재 텃밭에서 재배하는 것은 찾아오는 사람들의 끼니를 대접할 수 있는 벼와 채소뿐이다”며 다른 곳에 가면 농사를 짓고 있다는 말을 하기도 부끄럽단다.
▲지금의 관심사는
이병철 본부장의 화두는 ‘마음’이다. ‘자연인’ 이병철 본부장은 지난해 9월에 개교한 지리산 마음학교(cafe.daum.net/jirisanmaum, ☏ 070-8867-0680) 교장을 맡았다. 이곳은 귀농인, 시민, NGO 활동가, 청년들을 위한 마음공부의 장이다.
앞장서지 않겠다는 그가 다시금 속세로 등장하게 된 계기는 뭘까.
이 본부장은 “10여 년 이상 마음공부를 해왔지만 아직도 그 부분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에 처음에는 교장을 맡아달라는 권유를 거절했다”며 “후배들이 여러 차례 찾아와 세상을 바꾸려면 사람들의 마음을 바꿔야 하지 않겠냐고 부탁해 승낙하게 됐다”고 배경을 언급했다. 물론 그 역시도 수행법이나 마음공부법의 사회화와 보편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이미 하고 있었다.
그는 “지리산 마음학교에서는 가르치고 배우는 것보다는 함께 길을 찾아나간다”며 “종교와 문파를 넘어서 지구를 다녀간 성자들의 가르침 가운데 핵심적인 공통 가르침을 바탕으로 공부하고 자신을 포함해 모든 존재 안에 신성이 있다고 믿고 그에 따라 듣고 보고 말하고 행동하도록 하는 데 관심이 있다”고 밝혔다.
지리산 마음학교는 ‘참나의 쉼’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몸은 물론이고 마음과 정신까지 쉬면서 생명력을 재충전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
이 밖에도 그의 집에서는 만 5년째 물처럼생명평화학교 강의가 이어진다. 생명평화탁발순례단이 2004년 7월 마산, 창원, 진해 지역을 순례하면서 만난 인연을 바탕으로 시작했으며 매월 셋째 주 토요일 저녁에 모임을 가지며, 바가바드기타(힌두경전), 구르지혜프에 이어 지금은 해월 최시형 선생의 사상을 공부하고 있다.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여가 가능하다. 평화로워지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언제든 열려 있는 공간인 셈이다.
출처: 경남신문, 글=권태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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