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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사람의 향기] 김성수 통영옻칠미술관 관장
나전칠기 본고장 통영, 세계 옻칠 중심으로 키울 겁니다
-경남신문-
통영 가는 길에 봄을 시샘하는 바람이 분다. 오후의 나른함을 차창 밖 풍경 너머로 내보내려 하지만 따스한 햇살이 오히려 졸음을 부추긴다.
길가에는 노란 개나리들이 얼굴을 내밀 태세다. 대전~거제 고속도로를 지나 통영IC에서 시내로 접어들기 직전 넓고 푸른 바다를 끼고 있는 옻칠미술관의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차를 몰아 진입했다. 행정구역상으론 경남 통영시 용남동 화삼리다.
바다 전망을 시원하게 볼 수 있도록 입구를 통유리 창문으로 꾸민 현대식 단층 건물이 바로 옻칠미술관이다. 안으로 발을 들이자 어디선가 나타난 김성수 관장이 먼 길 왔다며 반갑게 손을 잡는다. 휴게실로 자리를 함께했다. 다소 희끗한 머리카락과 금속테 안경이 지적인 인상을 풍긴다.
2000년 역사의 옻칠문화를 통영에 꽃피우기 위해 도내 사립 최초로 등록미술관을 세웠다.
# 옻칠과의 우연한 인연
김 관장의 아버지는 어업에 종사했다. 초등학교 시절 3~4km나 떨어진 학교를 걸어다닌 그는 하교하면 곧바로 아버지의 일을 도왔다. 거들기 바빴기에 다른 일은 생각지도 못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 1학년을 다니던 중 우연히 통영여고 서무과장이던 친척아저씨의 권유로 옻칠을 알게 됐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통영에 설립된 ‘경남도립나전칠기 기술원 양성소’ 제1기생으로 입학하게 된 것이다.
친척아저씨가 세상사에 밝았던 터라 부모님의 반대는 없었다. 평생 통영에 살면서 이런 훌륭한 분들을 만나기 어렵다며 믿고 공부를 해 보라는 말에 부모님도 열심히 해 보라며 등을 떠밀었다. 옻칠에 대해 관심이 있었기에 싫지는 않았다.
당시 통영에 칠기양성소가 세워진 배경은 전쟁으로 정치·경제·문화가 마비됐고, 문화재들이 불타 없어지면서 전통문화를 보존·유지하자는 예술가들의 요구에 따른 것이다. 강사진은 당시 전쟁을 피해 온 당대 최고의 나전칠기 명인들이었다. 줄음질은 김봉룡 선생, 끊음질은 심부길 선생, 칠예는 안용호 선생, 데생은 장윤성 선생, 디자인 설계는 유강렬 선생에게서 배웠다. 이 밖에 피란으로 통영에 머물던 칠예의 거장 강창원 선생, 화가 이중섭씨의 특강에 통영출신 화가 김용주, 전혁림, 김상옥씨도 자주 들러 지도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김 관장에게는 실로 ‘기회’였다.
# 옻칠에 빠져들다
김 관장은 1953년까지 2년 동안 기술원에서 공부했다.
인문·사회분야보다 예능 기술에 소질을 보였다. 손재주가 좋았고, 남들에 비해 일처리도 깔끔하게 매듭짓는 편이어서 과제물 만들기에도 뛰어났다.
함경도 말을 쓰는 유강렬 선생을 제외하고 장윤성 선생 등 대부분이 서울말로 부드럽게 가르쳤기에 귀에 잘 들어왔고, 시골에서 미술을 접하기가 쉽지 않아 점차 재미에 빠져들었다. 이론은 미술에 관한 과목을, 실기는 나전칠기를 배웠다.
기술원 과정을 수료한 뒤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인문계 학교가 모여 있는 부산으로 갔다. 당시 어려운 환경이었기에 공부를 해야 나중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진로를 변경, 학업에 매진했다. 미술공부는 자연스레 잊혀졌다. 1년이 지났을 무렵 어렵사리 익힌 기능을 도중에 손 놓으면 굳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야간으로 옮기고 통영칠기사에 입사해 낮에는 나전칠기 기술을, 밤에는 공부를 했다.
당시 기능자는 있었으나 데생과 디자인을 할 수 있는 예술인은 별로 없었기에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진학을 위해 미화당백화점에서 일하며 돈을 벌었다.
#학생이 아닌 교육자로
대학에 가고자 했으나 부모님과 일곱 명의 동생을 생각해 진학을 접었다. 기술을 잘 배워 장남 노릇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에서였다.
졸업 후인 1956년 당시 통영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의 부소장(소장은 도지사였다)을 맡고 있던 김봉룡 선생의 부름을 받아 고향으로 내려왔다. 자신을 가르쳤던 은사들은 정부 수복으로 전부 서울로 올라갔던 터라 선생이 부족했던 터였다. 디자인과 설계, 데생, 나전과 칠예기술 등 모든 부문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면서 자신도 복습하는 의미에서 배웠다. 일본의 미술잡지를 보면서 4년 동안 독학을 통해 열정적으로 가르쳤다.
옻칠 공예의 전체적인 순서는 보다 틀이 잡혔지만 창의력 등 실력은 늘지 않았다. 통영은 바닥이 좁아 스스로 한계를 느꼈다. 보다 체계적으로 배우고 연구해야겠다는 열정과 포부에 1962년 서울로 올라왔다. 이듬해인 1963년 제12회 국전에 <문갑>을 출품해 공예부 최고상인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한 데 이어 3차례 연속 특선에 뽑혀 국전추천작가가 됐다. 당시 최고상을 받은 문갑은 지금도 옻칠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1969년 홍익대 공예학부 전임교수가 돼 강단에 섰고, 1972년에는 숙명여대로 자리를 옮겨 후학 교육과 작품활동을 병행했다.
#옻칠, 세계에 알리다
대학 강단에 설 당시 두 차례에 걸쳐(1973~1975) 정부 파견으로 아프리카 북단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튀니지에 가서 칠공예를 지도했다.
이후 파리로 가서 유럽의 여러 나라 작가들과 교류를 하면서 창작활동을 했으며 이 과정에서 우리 전통예술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고 전통나전칠기와 채화칠기에 바탕을 둔 새 장르의 형상화 작업을 시도했다. 바로 칠예조형물과 한국옻칠화이다.
미국에 사는 큰딸의 배려로 미국에 건너가 1998년 7월부터 한국옻칠화 연구에 전념했다. 2002년 미주 중앙일보 창간 28주년과 이민 100주년을 기념해 ‘한국현대옻칠화전’을 가졌다. 이때 새로운 이 미술 장르에 ‘한국옻칠화(Ott Painting)’라는 이름을 지어 붙이고 이를 세계에 알렸다.
이듬해 뉴욕 한국문화원 갤러리 코리아에서 다시 개최해 뉴욕 화단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며 호평을 받았고, 이어 2004년 5월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국내 처음으로 ‘옻칠로 표현한 회화’라는 주제의 개인전을 가지면서 옻칠미술가로 우뚝 섰다.
예향과 옻칠의 고장인 통영에 대한 고마움 때문일까. 때맞춰 진의장 통영시장이 나전칠기의 고장 통영으로 돌아올 것을 제안하면서 그는 미국 영주권을 포기한 채 귀국해 고향에 돌아왔다. 그리고 사재를 몽땅 털어 고향 언덕에 칠예의 모든 것을 전시하고 영구보존할 수 있는 옻칠미술관을 세웠다.
한국옻칠미술을 보호하고 육성하기 위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부족한 재정지원으로 미술관 운영이 어려운 상황이지만 김 관장은 “400년 나전칠기의 고장 통영을 세계옻칠 문화의 요람으로 꽃피우고 싶다”며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옻칠 공예 작품을 향유할 수 있도록 활성화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미소지었다.
글=김정민기자 isguy@knnews.co.kr
나전칠기 본고장 통영, 세계 옻칠 중심으로 키울 겁니다
-경남신문-
통영 가는 길에 봄을 시샘하는 바람이 분다. 오후의 나른함을 차창 밖 풍경 너머로 내보내려 하지만 따스한 햇살이 오히려 졸음을 부추긴다.
길가에는 노란 개나리들이 얼굴을 내밀 태세다. 대전~거제 고속도로를 지나 통영IC에서 시내로 접어들기 직전 넓고 푸른 바다를 끼고 있는 옻칠미술관의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차를 몰아 진입했다. 행정구역상으론 경남 통영시 용남동 화삼리다.
바다 전망을 시원하게 볼 수 있도록 입구를 통유리 창문으로 꾸민 현대식 단층 건물이 바로 옻칠미술관이다. 안으로 발을 들이자 어디선가 나타난 김성수 관장이 먼 길 왔다며 반갑게 손을 잡는다. 휴게실로 자리를 함께했다. 다소 희끗한 머리카락과 금속테 안경이 지적인 인상을 풍긴다.
2000년 역사의 옻칠문화를 통영에 꽃피우기 위해 도내 사립 최초로 등록미술관을 세웠다.
# 옻칠과의 우연한 인연
김 관장의 아버지는 어업에 종사했다. 초등학교 시절 3~4km나 떨어진 학교를 걸어다닌 그는 하교하면 곧바로 아버지의 일을 도왔다. 거들기 바빴기에 다른 일은 생각지도 못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 1학년을 다니던 중 우연히 통영여고 서무과장이던 친척아저씨의 권유로 옻칠을 알게 됐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통영에 설립된 ‘경남도립나전칠기 기술원 양성소’ 제1기생으로 입학하게 된 것이다.
친척아저씨가 세상사에 밝았던 터라 부모님의 반대는 없었다. 평생 통영에 살면서 이런 훌륭한 분들을 만나기 어렵다며 믿고 공부를 해 보라는 말에 부모님도 열심히 해 보라며 등을 떠밀었다. 옻칠에 대해 관심이 있었기에 싫지는 않았다.
당시 통영에 칠기양성소가 세워진 배경은 전쟁으로 정치·경제·문화가 마비됐고, 문화재들이 불타 없어지면서 전통문화를 보존·유지하자는 예술가들의 요구에 따른 것이다. 강사진은 당시 전쟁을 피해 온 당대 최고의 나전칠기 명인들이었다. 줄음질은 김봉룡 선생, 끊음질은 심부길 선생, 칠예는 안용호 선생, 데생은 장윤성 선생, 디자인 설계는 유강렬 선생에게서 배웠다. 이 밖에 피란으로 통영에 머물던 칠예의 거장 강창원 선생, 화가 이중섭씨의 특강에 통영출신 화가 김용주, 전혁림, 김상옥씨도 자주 들러 지도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김 관장에게는 실로 ‘기회’였다.
# 옻칠에 빠져들다
김 관장은 1953년까지 2년 동안 기술원에서 공부했다.
인문·사회분야보다 예능 기술에 소질을 보였다. 손재주가 좋았고, 남들에 비해 일처리도 깔끔하게 매듭짓는 편이어서 과제물 만들기에도 뛰어났다.
함경도 말을 쓰는 유강렬 선생을 제외하고 장윤성 선생 등 대부분이 서울말로 부드럽게 가르쳤기에 귀에 잘 들어왔고, 시골에서 미술을 접하기가 쉽지 않아 점차 재미에 빠져들었다. 이론은 미술에 관한 과목을, 실기는 나전칠기를 배웠다.
기술원 과정을 수료한 뒤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인문계 학교가 모여 있는 부산으로 갔다. 당시 어려운 환경이었기에 공부를 해야 나중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진로를 변경, 학업에 매진했다. 미술공부는 자연스레 잊혀졌다. 1년이 지났을 무렵 어렵사리 익힌 기능을 도중에 손 놓으면 굳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야간으로 옮기고 통영칠기사에 입사해 낮에는 나전칠기 기술을, 밤에는 공부를 했다.
당시 기능자는 있었으나 데생과 디자인을 할 수 있는 예술인은 별로 없었기에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진학을 위해 미화당백화점에서 일하며 돈을 벌었다.
#학생이 아닌 교육자로
대학에 가고자 했으나 부모님과 일곱 명의 동생을 생각해 진학을 접었다. 기술을 잘 배워 장남 노릇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에서였다.
졸업 후인 1956년 당시 통영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의 부소장(소장은 도지사였다)을 맡고 있던 김봉룡 선생의 부름을 받아 고향으로 내려왔다. 자신을 가르쳤던 은사들은 정부 수복으로 전부 서울로 올라갔던 터라 선생이 부족했던 터였다. 디자인과 설계, 데생, 나전과 칠예기술 등 모든 부문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면서 자신도 복습하는 의미에서 배웠다. 일본의 미술잡지를 보면서 4년 동안 독학을 통해 열정적으로 가르쳤다.
옻칠 공예의 전체적인 순서는 보다 틀이 잡혔지만 창의력 등 실력은 늘지 않았다. 통영은 바닥이 좁아 스스로 한계를 느꼈다. 보다 체계적으로 배우고 연구해야겠다는 열정과 포부에 1962년 서울로 올라왔다. 이듬해인 1963년 제12회 국전에 <문갑>을 출품해 공예부 최고상인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한 데 이어 3차례 연속 특선에 뽑혀 국전추천작가가 됐다. 당시 최고상을 받은 문갑은 지금도 옻칠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1969년 홍익대 공예학부 전임교수가 돼 강단에 섰고, 1972년에는 숙명여대로 자리를 옮겨 후학 교육과 작품활동을 병행했다.
#옻칠, 세계에 알리다
대학 강단에 설 당시 두 차례에 걸쳐(1973~1975) 정부 파견으로 아프리카 북단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튀니지에 가서 칠공예를 지도했다.
이후 파리로 가서 유럽의 여러 나라 작가들과 교류를 하면서 창작활동을 했으며 이 과정에서 우리 전통예술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고 전통나전칠기와 채화칠기에 바탕을 둔 새 장르의 형상화 작업을 시도했다. 바로 칠예조형물과 한국옻칠화이다.
미국에 사는 큰딸의 배려로 미국에 건너가 1998년 7월부터 한국옻칠화 연구에 전념했다. 2002년 미주 중앙일보 창간 28주년과 이민 100주년을 기념해 ‘한국현대옻칠화전’을 가졌다. 이때 새로운 이 미술 장르에 ‘한국옻칠화(Ott Painting)’라는 이름을 지어 붙이고 이를 세계에 알렸다.
이듬해 뉴욕 한국문화원 갤러리 코리아에서 다시 개최해 뉴욕 화단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며 호평을 받았고, 이어 2004년 5월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국내 처음으로 ‘옻칠로 표현한 회화’라는 주제의 개인전을 가지면서 옻칠미술가로 우뚝 섰다.
예향과 옻칠의 고장인 통영에 대한 고마움 때문일까. 때맞춰 진의장 통영시장이 나전칠기의 고장 통영으로 돌아올 것을 제안하면서 그는 미국 영주권을 포기한 채 귀국해 고향에 돌아왔다. 그리고 사재를 몽땅 털어 고향 언덕에 칠예의 모든 것을 전시하고 영구보존할 수 있는 옻칠미술관을 세웠다.
한국옻칠미술을 보호하고 육성하기 위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부족한 재정지원으로 미술관 운영이 어려운 상황이지만 김 관장은 “400년 나전칠기의 고장 통영을 세계옻칠 문화의 요람으로 꽃피우고 싶다”며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옻칠 공예 작품을 향유할 수 있도록 활성화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미소지었다.
글=김정민기자 isguy@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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