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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향기] 고승하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경남지회장

작성자
김철수
작성일
2010.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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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0
조회수
1609
내용
[사람의 향기] 고승하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경남지회장
“아이들 ‘기 살리기’ 어른들이 나서야죠”

-경남신문-

시골 초등학교에 다니던 소년 고승하가 또래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학교를 오간다. 곡명은 ‘검은 눈동자의 소녀'. 물론 음악책에 나오지 않는 노래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어요. 제가 곡을 만들었죠. 그 노래를 아버지께 들려드렸죠.혼내실 줄 알았는데 잘했다고 칭찬해 주셨어요.기분이 좋았죠.”
소년 고승하는 가사가 될 만한 ‘거리’만 보면 척 하고 곡을 붙이는 재능이 있었다. 마치 곡을 듣고 바로 악보로 받아 적는 청음(聽音)이나 처음 본 악보를 연주하는 시창(視唱) 훈련을 거친 듯했다. 이런 능력은 아버지로부터 일정 정도 물려받은 것일 수 있다.

“‘검은 눈동자의 소녀’를 들려드렸을 때,아버지께서도 당신의 자작곡이라며‘우리 엄마’를 가르쳐 주셨어요.아버지께서 작곡을 하신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어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능이 다시 대물림된 것일까. 그의 아들 고경천(35)은 피아노학원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지만,윤도현밴드나 크라잉 넛 등과 함께 녹음을 하고 공연을 했던 유명 키보드 연주자다.

해방 3년 뒤인 1948년 김해시 대저면(지금의 부산시 강서구 대저동)에서 태어난 고승하는 당시의 여느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힘든 시절을 보냈다. 중학교에 다니면서 신문을 배달했던 그는 야간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구두닦이를 하며 생활비를 댔다.

군 복무를 마치고 마산자유무역지역 입주업체에 일자리를 구했다. 그 시절 ‘직속상관’이었던 김명숙(59)씨를 만나 결혼해 마산사람이 됐다. 그는 그 결혼을 “생애 최고로 잘한 일 중 하나”라고 했다.

직장생활하던 그는 주일이면 교회에 나가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성경교사 역할을 하거나 성가대에서 노래를 가르쳤다.

“교회에 나오던 학생들이 저더러 ‘선생님은 음악교사가 돼야 해요’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시험공부하라며 참고서를 리어카 한 가득 싣고 오는 게 아닙니까.”

32살 되던 해, 그는 마산 가포에 자리한 마산대학(현 창원대학교) 음악과에 입학하면서 정식으로 작곡 공부를 시작했다.

“전공은 성악이었어요. 작곡 전공의 경우 피아노 연주를 해야 했는데, 저는 그게 안 됐어요. 교회 다니면서 풍금을 치기는 했지만….”

83년 교사 임용시험을 거쳐 공립인 남해상고에서 교편을 잡은 청년 고승하는 이듬해 마산여상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해 박노해 시인이 시집 ‘노동의 새벽’을 냈습니다. 시집에 실린 시들이 저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죠.”

‘노동의 새벽’에 빠져든 그는 이내 15편에 곡을 붙여 노동가요로 만들었다. 그중의 하나가 지금도 파업현장이나 노동자대회 등에서 불리고 있는 ‘고백’이다. ‘사람들은 날 보고 신세 조졌다 한다’로 시작하는 ‘아름다운 고백’에 곡을 붙인 ‘고백’은 고승하를 ‘전국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고백을 만든 이후였습니다. 서울에서 열린 대규모 집회에 가 봤는데, 집회 참가자들이 고백을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저도 놀랐습니다. 그런데 작가 미상으로 알려져 있지 뭡니까.”

89년 6년째 교편을 잡고 있던 마산여상을 떠난 그는 새로운 세상을 만난다.

‘시인의 마을’의 정태춘 등과 교분을 쌓던 그는 90년 민음협(민족음악인협회) 의장을 맡으면서 전국 단위의 노래운동을 펼쳐 나간다.

“조직생활을 벗어나고자 학교를 그만뒀습니다. 그런데 결국 조직을 맡게 되더군요.”

지난 2006년부터 지금까지 임기 2년의 민예총(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경남지회장을 3대째 맡고 있는 그는 ‘자판기’ ‘잡곡가’ 등 몇 가지 별명을 갖고 있다.

노래가 될 만한 글을 보면 자판기처럼 곡을 뽑아내니 자판기이고, 일반가요나 민중가요에다 동요, 가곡, 복음성가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곡을 만들어 내니 ‘잡곡가’가 됐다. 안치환의 ‘편지’도 그의 작품이다. 그가 모아 놓은 악보만 해도 2000여 곡, 실제로 작곡했던 곡은 이보다 훨씬 많을 듯하다.

그래도 그는 스스로를 동요작곡가라고 소개한다.
하긴 그는 교사생활을 접었던 89년에는 어린이예술단 아름나라를 창단, 금강산 공연을 포함해 지금까지 국내외 무대에서 400회가 넘는 공연활동을 펼치고 있다. 또 2000년에는 ‘동요 부르는 어른모임’인 ‘철부지’도 생겨났다.

첫 해 마산과 창원 두 지역에서 창단된 아름나라는 진해, 김해, 사천, 남해 등에 이어 부산, 대구, 광주 등 전국 31곳에서 생겨났다. 지역마다 학부모들이 나서 만든 자생적 어린이예술단들이다. 아름나라라는 예술단 이름은 황선하 시인의 ‘가자, 아름다운 나라로’에서 나왔다고 한다.

“마산 회원동 위쪽에 낙농마을이 있었어요. 교육 등 여러 가지 여건이 다른 지역에 비해 좋지 않았죠. 어떻게 하면 그곳에 살고 있는 어린이들의 기를 살려 줄까 하고 고민한 끝에, 참교육학부모회나 두레교회 사람들과 힘을 모아 예술단을 만든 거예요.”

아름나라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주로 운동권 노래를 만들었던 그는 이후 동요 작곡에 더 힘을 쏟았다.

그가 만든 동요의 노랫말에는 유명 동시인의 시도 있고, 자작시도 있지만, 초등학교 어린이가 쓴 글도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특히 그의 작품 중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글에 곡을 붙인 국악동요 ‘방안의 꽃’은 지난 2000년 국악동요제에서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오줌 싸도 이쁘고, 응아 해도 이쁘고, 잠을 자도 이쁘고, 잠을 깨도 이쁘고…’로 이어지는 자진모리 장단의 이 노래는 올해부터 초등학교 4학년 음악교과서에 실려 전국 초등학교에서 불리게 됐다.


그의 동요 작품은 맑은 동심을 그린 것이 대부분이지만, 교육이나 환경 등의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다룬 것도 눈에 띈다.

“아이들을 입시교육으로 내몰고 있는 현실만 보더라도, 어른이라는 것만으로 아이들에게 죄를 짓고 있는 셈”이라는 그는 “아이들이 맘껏 뛰놀고, 또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우리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노래를 통해 우리 사회에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그를 위해 지난 2008년 ‘아름나라 20년, 고승하 40년’이라는 이름의 음악회를 마련했다. 마산 3·15아트센터에서 열린 음악회에는 어린이예술단 아름나라는 물론, 강산에, ‘바위섬’의 김원중 등이 나와 축하의 노래를 불렀다.

환경과 평화의 소중함을 노래하고, 또 마산만 살리기에 나섰던 그는 지난 2004년 제6회 교보생명환경문화상 환경문화예술부문 대상을 받았다.

그는 “교보생명환경문화상을 받은 것은 그만큼 마산만이 썩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을 받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억장 무너지는 일이냐”며 “환경을 다룬 노래를 만들고, 또 시를 만든다고 물이 맑아지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환경을 중시하는 사람을 키우는 일에 지역사회가 나서야 한다”고 했다.

글=서영훈기자 float21@knnews.co.kr
사진=김승권기자 sk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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