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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우리나라 미술계의 산실
‘걸어 다니는 미술사전’ 김달진 김달진미술연구소장을 만나다
-서울문화투데이-
“중·고등학교 시절에 동네 어르신들이 ‘신문쪼가리나 모아서 밥이나 먹고 살겠냐’며 걱정하셨죠. 결국 그 일이 제가 밥 먹고 사는 일이 돼버렸네요”. 잊혀져가는 작가들이 안타까워 미술에 관한 자료는 보이는 것마다 모았다는 김달진 소장(56)은 이제 미술계는 물론 미술 광고시장까지 움직이는 일인자다. 작가는 물론 평론가들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미술자료 박사인 그를 만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땡볕이 내리쬐는 무더운 날씨임에도 연구소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스크랩으로 이룬 꿈과 아픔
중학교 시절부터 우리가 흔히 하는 우표수집, 상표수집 등 모으는 걸 좋아했던 김달진 소장. 지금처럼 미술 전시회가 많지도 않았고, 리플렛이나 도록처럼 좋은 인쇄물자체가 드물었던 그 당시 우연히 본 잡지 컬러면의 ‘이달의 명화’에 푹 빠져 스크랩하기 시작했다.
“무턱대고 모으다가 사실파, 인상파 등 유파별로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서양미술사 책을 읽으면서 켄트지에 붙여가며 정리했어요”
그러다가 고 3이 된 197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근대미술 60년전’을 통해 우리나라 유명 근대미술작가들의 작품들을 보면서 감동을 받게 된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 등 유명작가들 외에 다른 화가들에 대한 자료는 전후무후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때 이후로 서양화에서 우리나라 그림에 대한 자료 수집으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김달진 소장은 각종잡지에 소개된 미술관련 자료들을 보이는 대로 수집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 소개하는 편지를 작성해 미술평론가, 기자, 화랑 관계자 등 여러 군데 보냈었다. 자신의 PR 및 협조를 원하는 내용이었다.
아무도 관심을 안가지고 있던 그때, 당시 홍익대학교 박물관 관장이었던 고(故) 이경성 미술평론가가 그에게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답변을 해왔다.
“당시 유명했던 분이라 뵙자마자 큰 절부터 덥석 올렸었죠. 그때 이경성 관장님께서 ‘열심히 해보라’고 격려해주셨어요. 아마 이경성 관장님이 없었으면 지금의 저는 존재하지 않았을 거예요”
시간이 흘러 1981년 이경성 관장을 다시 만나게 되는 일이 생긴다.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으로 취임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찾아 간 것이다.
“‘임시직이라도 좋으니 미술관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말씀드렸죠. 결국 일당 4500원의 일용계약직으로 일하게 됐죠. 자료 쪽에는 워낙 밝아 나름대로 인정을 받으며 일했어요”
그러나 미술관련 학과를 졸업해야 큐레이터시험을 볼 수 있는 법적제약 때문에 승진은 커녕 오히려 강등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미술관의 개선되지 않는 대우에 좌절감은 커졌다. 게다가 당시 둘째 아이가 아파 월 45만원의 약값이 더 필요한 상황에 월급도 오르지 않았다.
결국 15년의 업무를 마감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정년퇴직 때까지 뿌리를 박겠다고 생각했었어요. 밖에서 볼 때도 그럴싸해 보이는 자부심 있는 직업이었죠. 하지만 밖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어요. 이후 잡지, 화랑, 사립미술관 등지를 노크했죠. 그래도 세상에 죽으란 법은 없는지 이후 가나아트센터 자료 실장으로 일할 수 있었어요”
◈해외서도 인정받는 ‘서울아트가이드’
가나아트센터에서 5년 10개월 동안 자료실장으로 일하다 독립한 김달진 소장은 2001년 1월, 발품을 팔아가며 8쪽짜리 접지형 잡지 ‘서울아트가이드’를 펴내게 된다. 창간 당시 ‘이거 가지고 밥이라도 먹고 살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졌던 그는 당시 어려웠던 사정에 대해 회상했다.
“영업이 쉽지 않아서 속이 많이 상했었죠. 전시 일정 훑어보다가 아는 작가가 있으면 광고를 부탁하기도 했고요. 3~4년간 많이 힘들었어요”
그러나 전화위복이란 말이 있듯, 창간 4년이 지나면서부터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다. 판형이 세련되게 바뀌고 발행부수 3만여권이 모자랄 정도다. 현재 작가와 대중, 화랑과 관객을 연결하는 매체로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더불어 460여개 미술관 갤러리의 정확한 전시 정보 제공과 전시장 무료 배포로 전시 광고효과 0순위로 꼽히게 된다.
“광고비도 일반 유가지보다 최대 70프로 이상 저렴할 뿐만 아니라, 제가 그동안 걸어온 길을 아는 많은 미술인들의 동정심과 신뢰가 바탕이 되면서 점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죠”
“2004년 일본 아트도큐멘테이션연구회(회장 高山正也)가 창립15주년 기념행사로 주최한 국제세미나 ‘동아시아에 있어서 미술 문화재 정보 네트워크화를 생각한다’에 우리나라 대표로 참여했을 때 ‘서울아트가이드’를 챙겨갔어요. 단번에 화제가 됐죠. 당시 일본이나 중국 대표들에게 ‘정부차원에서 낼 수 있는 것을 개인이 어떻게 내느냐. 대단하다’며 인정을 받았죠. 칼럼, 광고를 비롯해 해외전시에 대한 흐름, 미술 전문가들의 칼럼, 미술신간에 대한 폭넓은 정보 등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꿀리지 않는 좋은 컨텐츠를 갖고 있다는 점이 주목을 받았죠”
◈수많은 자료는 노력의 산실
“전시도록, 미술관 표등 여러 미술관련 자료를 다 합치면 18톤 분량 정도 돼요. 팜플릿 같은 것은 워낙 많아서 파악이 힘들고요. 고향인 옥천에도 4.5톤 정도 분량의 자료가 더 있어요”
서울 종로구 창성동에 있는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에는 ‘없는 게 없다’. 몇 년 전에는 자료 무게 때문에 바닥이 내려앉아 수리한 적도 있다하니 그 수집 열정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지금도 자료 기증 연락이 오고 있지만 포화상태인지라 다 받지 못한고 있다는 김달진 소장. 엄청난 양의 미술자료를 수집하다 보면 그에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도 있을 터. 그는 한국 최초 원색 도판 화집인 오지호, 김주경 2인 화집(1938)에 대한 이야길 꺼냈다.
“제가 원래부터 갖고 있던 화집은 일어판이었어요. 당시 일제강점기였으니 그런가 보다 싶었죠. 그러다가 작년에 차순관이라는 분이 기증한 걸 봤는데 국문판이 존재했던 거예요. 그동안 미술계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일이였던 지라 몰랐던 거죠”
수많은 자료 중에서 김달진 소장이 애착을 갖는 자료는 작가별 자료다. 어떤 작가의 파일을 들춰보면 신문기사를 비롯해 비평글, 작품 이미지 등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독일인 에카르트가 쓴 조선미술사(1929), 1954년 당시 문교부 장관이 예술가에게 발급하던 문화인증, 신세계화랑 전시브로셔(1971) 등 희귀 자료들도 많이 있다.
이렇듯 미술자료 수집·관리의 최고봉인 그는 각종 특강 및 강의를 많이 다닌다. “제가 아는 것, 혹은 알 수 있는 것들은 나눠주고 상담해준다”는 김 소장. 하지만 자료정보를 쉽게 얻으려는 사람들도 있어서 서운하고 화날 때도 있다고 털어놨다.
“하루는 미국에서 박사 논문을 쓴다는 분이 제 이메일로 ‘일제강점기 해방 시절 전 미국과 한국의 미술이 서로 교류했었다는 것을 입증해 줄 자료가 없느냐’고 보내왔어요. 어떻게 생면부지인 사람한테 이메일 달랑 하나 보내놓고 몇 십 년 동안 모은 자료를 그렇게 쉽게 달라고 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되요”
우리는 정보화 시대 살고 있다. 이는 장점도 있지만 부작용도 많다. 우스갯소리로 ‘포털 사이트에 검색되지 않은 자료는 다 죽은 자료’라고까지 표현한다. 너무 쉽게 자료를 얻으려 할 뿐, 검색되지 않는 것에 대해 책을 뒤져서 찾는 등의 수고를 귀찮아할 뿐이다.
“좋은 정보는 숨겨져 있는데 반해 너무 쉽게 얻으려고만 하죠. 이런 일을 하는 전문가 입장에선 아쉬운 점이죠. 저 같은 경우는 그만큼의 노력을 했기에 이렇게 온 건데 말이죠”
◈명실상부 미술계 뉴스메이커로 자리 잡다
김달진 소장은 미술 평론으로도 유명하다. 그동안 수집해 온 수많은 자료들을 근거로 작성하는 신랄한 평론들은 국내 미술계에 일대 파장을 몰고 왔다. 그는 선화랑에서 만들었던 미술 잡지 ‘선미술’ 1985년 겨울호에 실린 자신의 글을 보여주며 말을 이어갔다.
“‘한 해 동안의 전시기록이 매체마다 이렇게 다르다’, ‘작가들이 약력을 자기 마음대로 고쳐 쓴다’부터 시작해서 우리나라 미술계의 문제점들을 일목요연하게 집어냈죠”
한 개인이 작성한 글임에도 그만큼 신뢰가 있기에 유명매체에서도 글을 인용하기도 했고, 영어로 번역돼 영자매체에까지 소개되기도 했다. 더불어 ‘10년간의 미술계 10대 사건’과 같은 글들은 조선일보, 한겨레 등 주요 일간 신문에 그대로 실리기도 할 정도였다.
이렇듯 김달진 소장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미술 평론가나 미술자료 수집가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일반적으로 미술수집가라 하면 자기만족을 위해 개인적 취향에 맞는 것들을 모으는 이들이다. 하지만 그는 미술에 관련한 모든 자료를 수집해 김달진 미술자료박물관을 설립, 이 세상 사람들과의 공유를 시도한다.
뿐만 아니라 작가론적인 미술평론가들과도 엄연히 차이를 보인다. 평생을 바쳐 미술에 관한 데이터를 수집·분석해 그것을 토대로 우리 미술계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미학적 감각이나 필력이 아닌 수십 년의 노력에서 비롯된 그의 평론을 감히 누가 반박하겠는가.
그 결과 그는 국무총리 산하 한국직업능력개발연구원에서 새로운 직업모델을 창출한 성공사례로 소개되기도 했다.
“일반적인 수집가들이나 평론가들이 못했던 부분들을 하는 것이 바로 김달진이라는 사람이 미술계에서 차지하는 포지션이라 생각해요”
◈열정과 의지의 집약체 ‘대한민국 미술인 인명록Ⅰ’
얼마 전 한국 근·현대 미술인 4909명의 출생지, 학력, 전시경력 등 기초 정보를 담은 ‘대한민국 미술인 인명록Ⅰ’이 출간돼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대한민국 미술인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이 책을 만든 주인공은 바로 김달진 소장이다.
“실제적으론 7개월 동안 만든 것이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 ‘월간 전시계사’라는 미술잡지사에서 근무하던 1979년 때부터 이걸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앞서 말한 ‘근대 미술 60년전’을 관람했던 영향이 컸죠”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이지만, 김달진 소장은 그들을 지지하는 2인자와 3인자, 나아가 대다수의 범인(凡人)들까지 다뤄야겠다고 생각했다.
“평생 화가란 이름을 달고 살다가 죽었는데 그 존재 자체가 죽으면서 없어지는 건 아니죠. 게다가 우리나라 미술계를 풍부하게 연구하려면 이 사람들의 연구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문화체육관광부 지원으로 만든 인명록은 크게 창작과 비창작 미술인, 작고한 작가와 생존작가로 나뉜다. 뿐만 아니라 기존 미술연감 인명록에 빠져 있던 월북 및 납북 작가와 재외동포, 행방불명 미술인에 대한 정보도 꼼꼼히 수록돼 있으며, 이색 기록도 담겨 있어 눈길을 끈다.
“작고한 분들 같은 경우는 동년배 작가들과 유족에게 전화해서 물어보고,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을 추적하고 또 추적하고, 하다못해 젊은 작가들은 한문 이름을 잘 기재하지 않아서 일일이 확인하는 등 고생 좀 했죠. 또 누구를 싣고, 누구를 싣지 않아야 할지에 대해 기준을 정하기도 애매해서 12명 심의위원의 논의를 거치기도 했고요”
인명록이 세상에 나오자 반응은 굉장히 뜨거웠다.
“자기 아버지가 평생 화가였지만 아무도 몰랐었는데 인명록에 이름이 수록돼 책을 가보로 삼겠다고 보내달라는 사람, 재소자인데 신문을 보고 알게 됐다며 보내달라는 사람, 자신의 집에 호랑이 그림이 하나 있는데 그 작가에 대한 정보를 모르다가 인명록을 통해 알게 됐다며 보내달라는 사람 등 인명록을 원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지원 받을 때 천부만 찍도록 계약한 거라 공공기관에만 줄 수밖에 없었죠. 많이 아쉬웠죠”
김달진 소장은 앞으로 ‘대한민국 미술인 인명록Ⅱ, Ⅲ’도 집필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에게 있어 인명록은 단순한 자료 나열이 아닌 그만의 의지 표현 그 이상인 셈이다.
◈이제는 정부도 미술자료 보전에 관심 가져야
김달진 소장은 그 명성 탓에 한편에선 ‘돈 많이 벌었겠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연구소 직원들의 임금과 같은 기본적 문제부터 자료 공간의 확보 등과 같은 계속적인 발전의 이유로 오히려 점점 힘이든다고 한다.
“하나하나 천천히 쌓아가다 보니 잡지를 창간하고 연구소를 만들고 박물관까지 만들게 됐죠. 문제는 계속해서 좀 더 발전시키면서 데이터베이스도 구축을 해야 하는데 그것을 일일히 개인인 제가 다 하기엔 재정적 문제에 한계가 있더라고요”
이처럼 마땅히 국가가 해야 할 일들임에도 열정 하나로 우리나라 미술계를 위해 쉬지 않고 노력중인 그는 자신이 이루고픈 최대의 꿈으로 인사동에 ‘한국미술정보센터’ 건립을 얘기했다.
“기존의 국가기록보존소 같은 곳처럼 일반인에게 공개하기 힘든 그런 곳이 아닌 자료 박물관이자 북까페 개념을 도입한, 일반인들이 자주 접할 수 있는 ‘미술정보센터’죠. 인사동을 장소로 생각한 것은 접근성이 좋기 때문이고요”
공간 확보를 위해 정부기관이나 구청 등에 계속해서 접촉하고 있지만 쉽지 않다고 심경을 토로하던 그는 우리나라의 미술 자료에 대한 지원이 희박한 것에 대해 아쉬워했다.
“원로 작가들이 작고하면 작품들은 바로바로 챙기는데 반해 그분들의 일기처럼 한 작가에 대해 상세히 알 수 있는 자료들은 대부분 손실되거나 폐기되죠. 작년 11월에 미술 자료 관련한 아카이브(archive)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이 이유예요. 하지만 이것은 자료 하나하나에 대해 과학적 처리와 보존이 뒤따라야하는 국가적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에 제가 한다는 것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한계가 있죠. 정부차원에서 제대로 된 아카이브를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문화, 예술 강국으로의 발돋움을 위해 예전보다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는 정부지만 미술에 대한 지원은 연극, 뮤지컬 같은 공연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한 것이 사실이다. 고유성을 가진 하나의 물질로 남는 문화유산이자 영화, 디자인 등 여러 분야의 기초가 되는 순수 미술에 대한 다각적인 검토가 시급하다.
우리는 김달진이라는 개인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서울문화투데이=박기훈 기자]
‘걸어 다니는 미술사전’ 김달진 김달진미술연구소장을 만나다
-서울문화투데이-
“중·고등학교 시절에 동네 어르신들이 ‘신문쪼가리나 모아서 밥이나 먹고 살겠냐’며 걱정하셨죠. 결국 그 일이 제가 밥 먹고 사는 일이 돼버렸네요”. 잊혀져가는 작가들이 안타까워 미술에 관한 자료는 보이는 것마다 모았다는 김달진 소장(56)은 이제 미술계는 물론 미술 광고시장까지 움직이는 일인자다. 작가는 물론 평론가들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미술자료 박사인 그를 만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땡볕이 내리쬐는 무더운 날씨임에도 연구소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스크랩으로 이룬 꿈과 아픔
중학교 시절부터 우리가 흔히 하는 우표수집, 상표수집 등 모으는 걸 좋아했던 김달진 소장. 지금처럼 미술 전시회가 많지도 않았고, 리플렛이나 도록처럼 좋은 인쇄물자체가 드물었던 그 당시 우연히 본 잡지 컬러면의 ‘이달의 명화’에 푹 빠져 스크랩하기 시작했다.
“무턱대고 모으다가 사실파, 인상파 등 유파별로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서양미술사 책을 읽으면서 켄트지에 붙여가며 정리했어요”
그러다가 고 3이 된 197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근대미술 60년전’을 통해 우리나라 유명 근대미술작가들의 작품들을 보면서 감동을 받게 된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 등 유명작가들 외에 다른 화가들에 대한 자료는 전후무후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때 이후로 서양화에서 우리나라 그림에 대한 자료 수집으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김달진 소장은 각종잡지에 소개된 미술관련 자료들을 보이는 대로 수집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 소개하는 편지를 작성해 미술평론가, 기자, 화랑 관계자 등 여러 군데 보냈었다. 자신의 PR 및 협조를 원하는 내용이었다.
아무도 관심을 안가지고 있던 그때, 당시 홍익대학교 박물관 관장이었던 고(故) 이경성 미술평론가가 그에게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답변을 해왔다.
“당시 유명했던 분이라 뵙자마자 큰 절부터 덥석 올렸었죠. 그때 이경성 관장님께서 ‘열심히 해보라’고 격려해주셨어요. 아마 이경성 관장님이 없었으면 지금의 저는 존재하지 않았을 거예요”
시간이 흘러 1981년 이경성 관장을 다시 만나게 되는 일이 생긴다.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으로 취임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찾아 간 것이다.
“‘임시직이라도 좋으니 미술관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말씀드렸죠. 결국 일당 4500원의 일용계약직으로 일하게 됐죠. 자료 쪽에는 워낙 밝아 나름대로 인정을 받으며 일했어요”
그러나 미술관련 학과를 졸업해야 큐레이터시험을 볼 수 있는 법적제약 때문에 승진은 커녕 오히려 강등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미술관의 개선되지 않는 대우에 좌절감은 커졌다. 게다가 당시 둘째 아이가 아파 월 45만원의 약값이 더 필요한 상황에 월급도 오르지 않았다.
결국 15년의 업무를 마감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정년퇴직 때까지 뿌리를 박겠다고 생각했었어요. 밖에서 볼 때도 그럴싸해 보이는 자부심 있는 직업이었죠. 하지만 밖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어요. 이후 잡지, 화랑, 사립미술관 등지를 노크했죠. 그래도 세상에 죽으란 법은 없는지 이후 가나아트센터 자료 실장으로 일할 수 있었어요”
◈해외서도 인정받는 ‘서울아트가이드’
가나아트센터에서 5년 10개월 동안 자료실장으로 일하다 독립한 김달진 소장은 2001년 1월, 발품을 팔아가며 8쪽짜리 접지형 잡지 ‘서울아트가이드’를 펴내게 된다. 창간 당시 ‘이거 가지고 밥이라도 먹고 살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졌던 그는 당시 어려웠던 사정에 대해 회상했다.
“영업이 쉽지 않아서 속이 많이 상했었죠. 전시 일정 훑어보다가 아는 작가가 있으면 광고를 부탁하기도 했고요. 3~4년간 많이 힘들었어요”
그러나 전화위복이란 말이 있듯, 창간 4년이 지나면서부터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다. 판형이 세련되게 바뀌고 발행부수 3만여권이 모자랄 정도다. 현재 작가와 대중, 화랑과 관객을 연결하는 매체로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더불어 460여개 미술관 갤러리의 정확한 전시 정보 제공과 전시장 무료 배포로 전시 광고효과 0순위로 꼽히게 된다.
“광고비도 일반 유가지보다 최대 70프로 이상 저렴할 뿐만 아니라, 제가 그동안 걸어온 길을 아는 많은 미술인들의 동정심과 신뢰가 바탕이 되면서 점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죠”
“2004년 일본 아트도큐멘테이션연구회(회장 高山正也)가 창립15주년 기념행사로 주최한 국제세미나 ‘동아시아에 있어서 미술 문화재 정보 네트워크화를 생각한다’에 우리나라 대표로 참여했을 때 ‘서울아트가이드’를 챙겨갔어요. 단번에 화제가 됐죠. 당시 일본이나 중국 대표들에게 ‘정부차원에서 낼 수 있는 것을 개인이 어떻게 내느냐. 대단하다’며 인정을 받았죠. 칼럼, 광고를 비롯해 해외전시에 대한 흐름, 미술 전문가들의 칼럼, 미술신간에 대한 폭넓은 정보 등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꿀리지 않는 좋은 컨텐츠를 갖고 있다는 점이 주목을 받았죠”
◈수많은 자료는 노력의 산실
“전시도록, 미술관 표등 여러 미술관련 자료를 다 합치면 18톤 분량 정도 돼요. 팜플릿 같은 것은 워낙 많아서 파악이 힘들고요. 고향인 옥천에도 4.5톤 정도 분량의 자료가 더 있어요”
서울 종로구 창성동에 있는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에는 ‘없는 게 없다’. 몇 년 전에는 자료 무게 때문에 바닥이 내려앉아 수리한 적도 있다하니 그 수집 열정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지금도 자료 기증 연락이 오고 있지만 포화상태인지라 다 받지 못한고 있다는 김달진 소장. 엄청난 양의 미술자료를 수집하다 보면 그에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도 있을 터. 그는 한국 최초 원색 도판 화집인 오지호, 김주경 2인 화집(1938)에 대한 이야길 꺼냈다.
“제가 원래부터 갖고 있던 화집은 일어판이었어요. 당시 일제강점기였으니 그런가 보다 싶었죠. 그러다가 작년에 차순관이라는 분이 기증한 걸 봤는데 국문판이 존재했던 거예요. 그동안 미술계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일이였던 지라 몰랐던 거죠”
수많은 자료 중에서 김달진 소장이 애착을 갖는 자료는 작가별 자료다. 어떤 작가의 파일을 들춰보면 신문기사를 비롯해 비평글, 작품 이미지 등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독일인 에카르트가 쓴 조선미술사(1929), 1954년 당시 문교부 장관이 예술가에게 발급하던 문화인증, 신세계화랑 전시브로셔(1971) 등 희귀 자료들도 많이 있다.
이렇듯 미술자료 수집·관리의 최고봉인 그는 각종 특강 및 강의를 많이 다닌다. “제가 아는 것, 혹은 알 수 있는 것들은 나눠주고 상담해준다”는 김 소장. 하지만 자료정보를 쉽게 얻으려는 사람들도 있어서 서운하고 화날 때도 있다고 털어놨다.
“하루는 미국에서 박사 논문을 쓴다는 분이 제 이메일로 ‘일제강점기 해방 시절 전 미국과 한국의 미술이 서로 교류했었다는 것을 입증해 줄 자료가 없느냐’고 보내왔어요. 어떻게 생면부지인 사람한테 이메일 달랑 하나 보내놓고 몇 십 년 동안 모은 자료를 그렇게 쉽게 달라고 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되요”
우리는 정보화 시대 살고 있다. 이는 장점도 있지만 부작용도 많다. 우스갯소리로 ‘포털 사이트에 검색되지 않은 자료는 다 죽은 자료’라고까지 표현한다. 너무 쉽게 자료를 얻으려 할 뿐, 검색되지 않는 것에 대해 책을 뒤져서 찾는 등의 수고를 귀찮아할 뿐이다.
“좋은 정보는 숨겨져 있는데 반해 너무 쉽게 얻으려고만 하죠. 이런 일을 하는 전문가 입장에선 아쉬운 점이죠. 저 같은 경우는 그만큼의 노력을 했기에 이렇게 온 건데 말이죠”
◈명실상부 미술계 뉴스메이커로 자리 잡다
김달진 소장은 미술 평론으로도 유명하다. 그동안 수집해 온 수많은 자료들을 근거로 작성하는 신랄한 평론들은 국내 미술계에 일대 파장을 몰고 왔다. 그는 선화랑에서 만들었던 미술 잡지 ‘선미술’ 1985년 겨울호에 실린 자신의 글을 보여주며 말을 이어갔다.
“‘한 해 동안의 전시기록이 매체마다 이렇게 다르다’, ‘작가들이 약력을 자기 마음대로 고쳐 쓴다’부터 시작해서 우리나라 미술계의 문제점들을 일목요연하게 집어냈죠”
한 개인이 작성한 글임에도 그만큼 신뢰가 있기에 유명매체에서도 글을 인용하기도 했고, 영어로 번역돼 영자매체에까지 소개되기도 했다. 더불어 ‘10년간의 미술계 10대 사건’과 같은 글들은 조선일보, 한겨레 등 주요 일간 신문에 그대로 실리기도 할 정도였다.
이렇듯 김달진 소장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미술 평론가나 미술자료 수집가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일반적으로 미술수집가라 하면 자기만족을 위해 개인적 취향에 맞는 것들을 모으는 이들이다. 하지만 그는 미술에 관련한 모든 자료를 수집해 김달진 미술자료박물관을 설립, 이 세상 사람들과의 공유를 시도한다.
뿐만 아니라 작가론적인 미술평론가들과도 엄연히 차이를 보인다. 평생을 바쳐 미술에 관한 데이터를 수집·분석해 그것을 토대로 우리 미술계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미학적 감각이나 필력이 아닌 수십 년의 노력에서 비롯된 그의 평론을 감히 누가 반박하겠는가.
그 결과 그는 국무총리 산하 한국직업능력개발연구원에서 새로운 직업모델을 창출한 성공사례로 소개되기도 했다.
“일반적인 수집가들이나 평론가들이 못했던 부분들을 하는 것이 바로 김달진이라는 사람이 미술계에서 차지하는 포지션이라 생각해요”
◈열정과 의지의 집약체 ‘대한민국 미술인 인명록Ⅰ’
얼마 전 한국 근·현대 미술인 4909명의 출생지, 학력, 전시경력 등 기초 정보를 담은 ‘대한민국 미술인 인명록Ⅰ’이 출간돼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대한민국 미술인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이 책을 만든 주인공은 바로 김달진 소장이다.
“실제적으론 7개월 동안 만든 것이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 ‘월간 전시계사’라는 미술잡지사에서 근무하던 1979년 때부터 이걸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앞서 말한 ‘근대 미술 60년전’을 관람했던 영향이 컸죠”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이지만, 김달진 소장은 그들을 지지하는 2인자와 3인자, 나아가 대다수의 범인(凡人)들까지 다뤄야겠다고 생각했다.
“평생 화가란 이름을 달고 살다가 죽었는데 그 존재 자체가 죽으면서 없어지는 건 아니죠. 게다가 우리나라 미술계를 풍부하게 연구하려면 이 사람들의 연구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문화체육관광부 지원으로 만든 인명록은 크게 창작과 비창작 미술인, 작고한 작가와 생존작가로 나뉜다. 뿐만 아니라 기존 미술연감 인명록에 빠져 있던 월북 및 납북 작가와 재외동포, 행방불명 미술인에 대한 정보도 꼼꼼히 수록돼 있으며, 이색 기록도 담겨 있어 눈길을 끈다.
“작고한 분들 같은 경우는 동년배 작가들과 유족에게 전화해서 물어보고,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을 추적하고 또 추적하고, 하다못해 젊은 작가들은 한문 이름을 잘 기재하지 않아서 일일이 확인하는 등 고생 좀 했죠. 또 누구를 싣고, 누구를 싣지 않아야 할지에 대해 기준을 정하기도 애매해서 12명 심의위원의 논의를 거치기도 했고요”
인명록이 세상에 나오자 반응은 굉장히 뜨거웠다.
“자기 아버지가 평생 화가였지만 아무도 몰랐었는데 인명록에 이름이 수록돼 책을 가보로 삼겠다고 보내달라는 사람, 재소자인데 신문을 보고 알게 됐다며 보내달라는 사람, 자신의 집에 호랑이 그림이 하나 있는데 그 작가에 대한 정보를 모르다가 인명록을 통해 알게 됐다며 보내달라는 사람 등 인명록을 원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지원 받을 때 천부만 찍도록 계약한 거라 공공기관에만 줄 수밖에 없었죠. 많이 아쉬웠죠”
김달진 소장은 앞으로 ‘대한민국 미술인 인명록Ⅱ, Ⅲ’도 집필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에게 있어 인명록은 단순한 자료 나열이 아닌 그만의 의지 표현 그 이상인 셈이다.
◈이제는 정부도 미술자료 보전에 관심 가져야
김달진 소장은 그 명성 탓에 한편에선 ‘돈 많이 벌었겠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연구소 직원들의 임금과 같은 기본적 문제부터 자료 공간의 확보 등과 같은 계속적인 발전의 이유로 오히려 점점 힘이든다고 한다.
“하나하나 천천히 쌓아가다 보니 잡지를 창간하고 연구소를 만들고 박물관까지 만들게 됐죠. 문제는 계속해서 좀 더 발전시키면서 데이터베이스도 구축을 해야 하는데 그것을 일일히 개인인 제가 다 하기엔 재정적 문제에 한계가 있더라고요”
이처럼 마땅히 국가가 해야 할 일들임에도 열정 하나로 우리나라 미술계를 위해 쉬지 않고 노력중인 그는 자신이 이루고픈 최대의 꿈으로 인사동에 ‘한국미술정보센터’ 건립을 얘기했다.
“기존의 국가기록보존소 같은 곳처럼 일반인에게 공개하기 힘든 그런 곳이 아닌 자료 박물관이자 북까페 개념을 도입한, 일반인들이 자주 접할 수 있는 ‘미술정보센터’죠. 인사동을 장소로 생각한 것은 접근성이 좋기 때문이고요”
공간 확보를 위해 정부기관이나 구청 등에 계속해서 접촉하고 있지만 쉽지 않다고 심경을 토로하던 그는 우리나라의 미술 자료에 대한 지원이 희박한 것에 대해 아쉬워했다.
“원로 작가들이 작고하면 작품들은 바로바로 챙기는데 반해 그분들의 일기처럼 한 작가에 대해 상세히 알 수 있는 자료들은 대부분 손실되거나 폐기되죠. 작년 11월에 미술 자료 관련한 아카이브(archive)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이 이유예요. 하지만 이것은 자료 하나하나에 대해 과학적 처리와 보존이 뒤따라야하는 국가적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에 제가 한다는 것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한계가 있죠. 정부차원에서 제대로 된 아카이브를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문화, 예술 강국으로의 발돋움을 위해 예전보다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는 정부지만 미술에 대한 지원은 연극, 뮤지컬 같은 공연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한 것이 사실이다. 고유성을 가진 하나의 물질로 남는 문화유산이자 영화, 디자인 등 여러 분야의 기초가 되는 순수 미술에 대한 다각적인 검토가 시급하다.
우리는 김달진이라는 개인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서울문화투데이=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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