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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택탐방>공재윤두서고택(恭齋尹斗緖古宅)

작성자
김철수
작성일
2010.09.09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1371
내용
공재 윤두서고택(恭齋尹斗緖古宅)

<문화유산신문>

땅 끝을 찾아 하염없이 가는 길은 좋다. 그 먼 곳을 찾는 사람은 괜히 가는 게 아니다. 마음을 빗질하고 뭔가 영원한 울림을 만나기 위해서다. 여름 소나기가 한차례 지나간다. 풍경과 사람이 그대로 고요속에 잠긴다. 비온 뒤 적막한 바닷가, 외로운 옛집을 찾아가는 동안 이미 마음의 짐 태반을 내려놓는다. 이곳까지 올 동안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나, 세상의 끝에서 그 물음을 물었던 옛사람, 공재 윤두서 선생을 찾아간다.공재 윤두서 선생을 모르는 사 람 도 있 을까. 선생은 우리 에게 몹시 낯익다 . 행여 선생의 행적을 소상히 알지 못한다 해도 선생의 자화상을 본 사람이 라면 기억에서 영원히 지워버리지 못할 것이다. "세상을 넘어설 듯한 기세를 담은 강렬한 눈빛, 치켜 올라간 눈썹과 굳게 다문 입, 불그레한 낯빛과 한 올 한 올 묘사된 무성한 수염…"

이 초상화 앞에 서면, 응축된 선생의 굴곡진 삶과 들끓었던 내면세계를 단박에 알아채고 압도될 수밖에 도리 없다.
1668년에 해남 백련동 옛집에서 태어난 공재 선생은 고산 윤선도 선생의 증손이다. 고산 선생은 손자들 가운데 가장 길한 점괘를 타고난, 넷째 손자인 그를 해남 윤씨 어초은공파 종손으로 삼았다. 당시 해남 윤씨 집안은 해남 지역의 토호로서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고, 여러 대에 걸쳐 과거에 합격한 사대부들이 연이어 나온 선비 가문으로 입지가 굳어져 있었다.
뛰어난 재능과 학식을 겸비한 공재 선생은 젊은 시절에는 과거를 통해 출세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쟁이 심했던 정치적 환란의 시절, 선생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유배를 가거나 목숨을 잃었다. 강직한 남인 집안의 종손으로 선생은 집안을 보전하기 위해서라도 출세의 소망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선생은 세상사를 관조하며 학문과 사상, 예술에 마음을 쏟아 두루 꿰뚫고 그궁극을 추구했다. 당시 경서와 병서, 점술, 지도, 예악, 산술, 심지어 패관소설에 이르기까지 선생이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그야말로 한 시대의 정신과 문화를 다 방면으로 온전히 체득한 르네상스인이었다. 서양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선생에 견줄 수 있을까.
특히 선생에게 그림은 학문과 사상을 담아내는 수단이었다. 지체 높은 가문에서 태어나 사람들의 기대를 받았던 선비가 자신의 재능과 학식을 천한 기예로 여겼던 그림을 통해 표출했던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겸재 정선이 있었지만 공재 선생의 그림이 훨씬 높은 평가를 받았고 우리나라 남종화와 풍속화의 종장(宗匠)으로 꼽혔다. 공재 선생처럼 학행을 겸비한 이상적인 선비화가는 이전에도 없었고 그이후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해남 백포마을에는 공재 선생의 옛집이 바다를 바라보며 망부산에 안겨 있다. 바다에 몸을 내준 이 마을에 이르러 옛집의 문턱에 들어서면 드디어 와야 할 곳에 왔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인격이 망가지고 우울한 나를 발가벗기고 어설프게나마 나의 진짜 모습을 그려보고 싶다는 소망이 고개를 드는 탓이다. 그래서 공재 선생의 피를 이어받은 그 후손을 만나는 일이 그렇게 기다려졌던 것.

공재 윤두서 고택에서 공재 선생의 11대손 윤항식 선생을 만났다. 광주에서 이 옛집으로 빗길을 달려온 선생은 더 먼 곳에서 온 손님을 방안으로 맞는다. 눈매며 콧날이 공재 선생을 닮았다. 선생은 어루 쓰다듬는 눈길로 집안을 휘둘러본다. 얼마 전 도배를 잘못해 문짝이 맞지 않아 기우뚱 열려 있고 물기 머금은 바람과 떠도는 먼지로 대청마루는 윤기를 많이 잃었다. 부끄럽고 난감한 일이 어디 한두 가지인가. 선생은 착잡한 표정으로 얽힌 이야기를 풀었다.
고산 선생이 보길도에서 백포 포구를 거쳐 해남으로 가는 길에 후손을 위해 눈여겨두었던 땅에, 선생의 맏아들이 부친을 위해 48칸짜리 집을 앉힌 지 어느덧 3백 40년이 흘렀다. 공재 선생이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귀향하면서 이곳 백포마을은 선생의 후손들이 일군 자자일촌 마을이 되었다. 해남 윤씨 집안의 영화를 보여주 듯 기와집들이 처마를 다정히 맞대고 즐비해 한때 105호에 이르렀다.
이 옛집은 대문에 누각을 올려 그 위에 올라 멀리 바다를 내다볼 수 있었고, 문간채와 사랑채, 안채가 ㅁ자 형태로 이루어져 바닷바람을 막았으며, 연자방아가 있는 네 칸짜리 곳간을 비롯해 사당도 두 채로 나뉘어져 있었다. 크지 않고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안으로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집이었다. 원래의 모습에서 크게 그르치게 된 것은 일제를 거쳐 근대로 건너오면서였다. 지난날을 회상하며 윤항식 선생의 이야기가 깊어진다.
만석이 넘는 재산을 물려받은 조부(윤광현)는 선박회사를 차려 사업을 했으나크게 실패했다. 연이어 광주고보를 졸업한 부친(윤영대)은 학교교장으로 있다가 사상문제에 연루되어 29살이라는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윤항식 선생의 나이 5살 때였다. 젊고 준수한 아버지는 사랑채 마루에 앉아 어린 아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치곤 했다. 그 삼엄한 일제 때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던 집안이었다.
화재로 사랑채가 소실되고 조모가 세상을 뜨면서 옛집은 무방비 상태에 방치되어 좋은 것들이 하나둘씩 감쪽같이 사라졌다. 윤항식 선생은 방방마다 바둑을 두는 신선들, 혹은 소를 타고 피리를 부는 목동 같은 그림이 늘 눈앞에 어렸던 유년시절을 떠올렸다. 여러 차례 그 곱고 귀한 것들만 골라서 도난당한 아픈 기억이 있다. 선생은 많은 세월 광주로 서울로 대전으로 대처를 떠돌았고 보성의 한 중학교 교장을 끝으로 직업에서 물러났다.
공재 선생은 45살에 서울에서 해남으로 돌아왔다. 기근에 허덕이는 마을사람에게 염전을 만들어 살 길을 열어주고, 자신의 삶을 정리한 후 48살에 돌연 감기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실학을 완성한 성호 이익은 선생의 죽음을 애달파하며 "이제 누구한테 배울 것인가" 탄식했다. 세상에서의 일을 끝내고 윤항식 선생도 이 옛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윤항식 선생은 대문도 없이 서둘러 쌓은 돌담이며 바람이 들이치는 옛 사랑채 터를 서성였다. 이 터에 뿌리내린 공재 선생의 비원(秘願)을 가늠해보는 듯했다.
조금만 손보면 옛 모습을 그대로 되살려 낼 수 있을 것이다. 화가인 종부 고윤숙씨가 곁에 있고 두 아들이 버티고 있으니. 지난날의 옛집 모습을 좇아 정성어린 보존책을 서둘러 마련하고 선생의 손길이 닿으면서 귀하게 지켜지고 차츰 참되게 가꾸어질 것이다.
봉긋한 뒷산 언덕에 잠든 공재 선생의 묘를 찾아가 그곳에 서서 세상을 내다본다. 아아, 장관이다. 공재 선생은 먼 바다에 지는 낙조를 바라보며 번뇌를 다독였을 테다. 바다를 달려온 바람이 이마를 시원하게 한다. 그 바람을 맞으며 자꾸 얽히려는 머리를 맑히고 백포마을을 돌아나간다.
<김정겸 전주주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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