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ENU

지역정보

제목

국제도시 김해의 부활을 위하여

작성자
김철수
작성일
2010.12.11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1337
내용

국제도시 김해의 부활을 위하여
거주 외국인들의 이국적 문화요소 활용한 ‘외국인 거리’ 조성을

 

 

요즈음 김해시내에서는 우리와 다른 모습의 사람들을 적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특히 주말이 되면 수로왕릉 언저리와 동상동 시장, 그리고 내외동 아파트 숲의 시장과 대형마트 등을 메우고 있는 여러 얼굴의 외국인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아시아마트’ 같은 이름의 가게들에는 외국인들만을 위한 물품이나 식재료들을 진열하고 있어, 그 색깔이나 문양들에서 제법 이국적인 분위기까지 느껴지게 한다. 지난달 김해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 주최의 외국인체육대회에 자원봉사 나간 학과 학생들을 위해 잠깐 머리를 디밀었던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동광초등학교 운동장을 가득 메운 세계 각국의 외국인들이 이렇게 많이 김해에 살고 있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2009년 11월 현재 김해시에는 44개국 이상을 헤아리는 1만4653명의 외국인이 등록되어 있다. 이들 중에 물론 근로자가 가장 많고, 다문화가정을 이룬 이들과 유학생들도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더 많은 수의 불법체류자도 고려해야 한다는 추산도 있지만, 이 숫자만 해도 전국에서 광역시를 제외하고 안산시 다음으로 가장 많은 규모라 한다.

베트남(3238명) 중국(1262명) 인도네시아(1232명) 필리핀(986명) 스리랑카(821명) 우즈베키스탄(736명) 순으로 아시아에서 온 이들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미국(113명) 러시아(53명) 영국(31명) 캐나다(31명) 등과 같은 서양 사람들도 적지 않게 거주하고 있다. 이러한 외국인 거주자의 규모와 다양성은 국제도시의 50만 김해시민이 함께 살아가야 할 방안을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게 하였다.

사실 김해가 이렇게 국제도시의 면모를 가지게 되었던 것은 지금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2000~1500년 전에 번영하였던 가야시대의 김해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몇 안 되는 국제도시였다.

‘삼국지’는 3세기경까지 황해도 지역에서 일본열도로 통하는 중간 기착항구로 김해의 구야국을 기록하고 있으며, 봉황동유적의 회현리패총에서 발견된 중국화폐 화천(貨泉)과 대성동·양동고분군에서 출토된 중국제 거울과 왜 계통의 문물들은 활발한 대외교류를 보여주고, 최근에 구산동유적에서 발견된 수많은 왜의 야요이토기(彌生土器)는 어느 정도 왜인(倭人)의 거주를 생각하게 한다.

더구나 탁월했던 가야의 철 생산은 서북한의 중국군현과 일본열도의 왜로 철을 수출하는 무역항으로서 김해의 위상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김해는 이미 1700년 전에도 동아시아 교역의 중심인 국제도시의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김해평야의 퇴적으로 항구도 잃고, 김해공항의 부산 편입으로 공항도 잃었지만, 1500년 만에 김해는 국제도시로 부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전통 위에 외국인 근로자와 다문화가정, 그리고 유학생의 유입과 증가로 인한 기회를 어떻게 살리는가는 이제부터의 문제이다.

우리의 3D를 대신 맡아 줄 고용 인력으로서 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의 이국적 문화요소를 활용하는 정책도 아울러 요구된다. 외국인을 초대해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고, 체육대회나 대동제를 통해 우리 사회에 대한 적응력을 높이는 것도 필요하지만, 단발적인 계획이나 행사보다 그들의 정착을 보장할 수 있는 현실적인 계획이 필요하다. 각국의 특징을 살려 재래시장의 재개발에 활용한다든지, 새로운 도시계획이나 외국인 거리를 조성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이스탄불의 바자르 같은 분위기의 국제시장이 동상동 재래시장에 계획되어 좋을 것이고, 진영이나 한림에 베트남이나 우즈베키스탄 마을이 만들어져 좋을 것이며, 내외동의 거리에 아메리칸스트리트나 차이나타운이 조성되어 좋을 것이다.

 

[경남일보]

이영식(인제대 역사고고학 교수)

0
0

게시물수정

게시물 수정을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댓글삭제게시물삭제

게시물 삭제를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