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이 필 때 봅시다."
노 작가가 봄을 앞두고 던진 말이다. 유난히 추운 겨울에 만나 작은 몸을 움츠렸던 작가는 겨울을 지나면서 겨우 웃으며 말을 건넸다.
30년간 운영했던 학원을 정리하고 집으로 몸과 마음을 옮기면서 집 안팎으로 손을 본 것이다. 그동안 그린 작품과 화구를 보관할 컨테이너를 겹겹이 쌓아 정리를 했지만 여전히 어지럽다. 2층 작업실에도 그림 때문에 발 딛기 조심스럽다.
집 구조 변경을 끝내자마자 곧 붓을 잡았다. 목련이 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즐겨 그리던 것이 목련꽃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목련작가란 호칭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서 목련이 피는 4월이 1년 중 가장 중요한 농사철이다. 수채화가 조현계 작가의 작업실에 봄이 찾아왔다.
목련꽃이 활짝 핀 그의 작업실에는 마무리 작업을 앞둔 미완성 작품이 여럿 늘어서 있다. 하루 꼬박 그려야 한 점의 작품이 만들어지니 5일 정도 작업을 한 모양이다.
하판덕·배달래 등 1000여 명 제자 길러내
옛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더니 어디선가 찾아온 사진첩 하나를 펼쳐 놓는다. 젊은 시절 사진 뒤로 여러 미술인들의 옛 시절 사진이 차례로 나온다. 대부분 제자들이다. 마산 삼진중학교, 제일여고에서 교편을 잡던 시절의 학생도 있고 학원 운영시절의 제자도 있다.
조 작가의 말이 빨라진다.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자랑이다. 자식 팔불출은 보았어도 제자 '팔불출'은 처음이다. 제자 자랑에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것을 보면 천상 미술선생이 천직이었나 보다. 잠시 제자 자랑을 들어볼 요량이었는데 제자들의 팸플릿까지 들고 와 설명이 이어진다.
하판덕, 조재익, 노춘석, 노충현, 박두리, 조충래, 정원식, 이임호, 김경미, 이종두, 김용식, 이성도, 이강석, 배달래 등 지역과 전국서 이름값 하는 작가들이 대거 들어있다. 지금까지 1000명은 될 듯 하단다.
계림미술학원을 나온 학생들이 모여 76년부터 94년까지 계림전이란 전시를 열기도 했다. 계림미술학원은 고 남정현 작가가 문을 연 남화실에 이어 만들어진 도내 2번째 화실이다. 조 아틀리에서 학생들은 그림그리기를 체계적으로 지도받았다. 조 아틀리에란 이름으로 시작했다가 학교 교사를 그만둔 75년부터 계림미술학원으로 바꿔 본격적인 입시미술학원으로 운영했다.
계림미술학원은 그가 평생 몸담은 공간이다. 70년 당시 군에서 제대해 아틀리에 만들 자금을 마련하고자 크리스마스카드를 만들었다. 당시 판매되는 크리스마스카드 그림은 조잡하기 짝이 없었는데 조 작가는 명함크기의 카드에 직접 그림을 그려서 팔았다. 하루 100장씩 그려 3000장을 만들어 15만 원이란 돈이 생긴 것이다. 전세금 5만 원, 인테리어 5만 원, 석고상 5만 원으로 계림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지금의 모습에서 당시 호랑이 선생으로 유명했던 조 작가의 모습을 유추하기는 쉽지 않다. "당시는 매로 학생을 다스리던 시절이었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지역에서 서울대, 홍대 보내려면 죽자 살자 그림 그려야 했거든. 그러니 매 맞으러 학원에 온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지. 어떤 여학생은 내가 옆에만 가도 울 정도였으니 엄하기로 유명했지. 그래도 성과가 있어 원하는 대학으로 진학률이 높아 다행이었어."
91년 동서미술상 초대수상, 작가로도 인정
그가 미술선생이 아닌 작가로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이 동서미술상 수상 때다. 91년 초대 수상자였기 때문에 더욱 값진 상이 되었다.
"꺾기와 눌리기가 주특기지." '조현계 작가의 수채화가 다른 수채화와는 다른 특징을 이야기 해달라'고 하니 그는 직접 작품을 가져다가 설명한다. 미묘한 차이를 설명하는 화가는 신이 나 있었다.
"비구상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남겨진 바람을 이야기했다. 그리곤 구석진 곳에서 80년대 작업한 비구상 작품을 꺼내든다. 한 번도 발표한 적이 없는 작품들이다. "이 녀석들에게도 빛을 보여줘야 할 것 같아서…"라며 말을 흐린다. 문을 들어서면서 보지 못한 목련나무 한 그루가 그의 작업실 창문에 기대고 '자신을 그려 달라'는 듯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