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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의 '영화 전성시대' (상) 일제시대~1970년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1.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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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2175
내용

마산의 '영화 전성시대' (상) 일제시대~1970년대

1900년대 이후 도내 영화산업 주름잡다

 

 

지난 14일 올해로 열여섯 돌을 맞은 부산국제영화제가 막을 내렸다. 70개국 307편에 달하는 영화와 세계적 감독과 배우들이 부산을 찾았다. 즉 부산은 명실상부한 '영화의 도시'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중. 그러나 마산이야말로 일제시대 이후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가장 '핫'한 영화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는지. 이번 주 월요문화기획에서는 추억 저편으로 사라져 간 옛 극장과 우리 지역의 영화산업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보는 코너를 마련했다.

▲광복 이전의 극장들의 면모

1900년대 초반 마산에는 희락좌, 화서좌, 마산좌, 수좌, 도좌, 앵관 이라고 하는 일본식 극장들이 포진해 있었다. 이들 극장은 가부키나 무용, 극 공연을 하는데 쓰였고 그 모양도 2층 건물에 다다미로 꾸며지는 등 일본풍이 많았다. 1920년대에 들어서 차차 활동사진(영화)이 상영이 늘기 시작했는데, 지배국이었던 일본에서 영화가 건너오다 보니 지리적으로 가까운 부산과 경남지역에 최신영화가 가장 먼저 상륙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산은 특이하게도 신마산과 구마산에 위치한 영화관을 따로 구분해 작품을 올리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는 조선인과 일본인 거주지역이 확연히 나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산에서 제작된 최초의 영화

1932년에는 현대적 극영화 '청춘의 설움'이라는 영화가 마산에서 제작됐다. 당시 신문기사를 살펴보면 마산 오동동에 '불멸 키네마'라는 영화 제작사가 촬영본부를 두고 있으면서 8권에 달하는 이 장편극을 영화화했다고 나와있다. 원작 및 각색은 김우순, 감독은 이영춘, 주연은 김성대, 이순활, 김영자 였다. 하지만 그후 어디에서도 이 영화가 개봉되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다. 당시에는 검열로 인해 많은 작품들이 미공개로 사리지는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에 개봉이 무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화산업의 비약적 발전

광복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 우리나라 영화 산업은 경제개발과 맞물려 질과 양적인 면에서 급격한 수직상승을 보였다. 이때는 지금처럼 대자본을 기반으로 한 기업보다 지방에 적을 둔 개인 제작자들의 힘이 막강했으며 김기영, 유현목, 이만희 등 기라성 같은 감독들과 김승호, 최은희, 신영균, 김지미, 신성일 등 국민배우급 스타들이 뜨고 졌다. 이에 덩달아 마산의 극장가도 활기를 띠었다. 1951년에는 '예술영화사'에서 마산의 극작가 정진업의 사나리오에 바탕을 두고 신경균 감독에 최현, 황여희 등이 출연한 '삼천만의 꽃다발'이라는 영화를 제작했다. 이 영화에는 마산이 낳은 춤꾼 김해랑과 그의 제자들이 특별출연하기도 했다. 제2육군병원과 국립마산결핵병원이 기획·후원했는데 그 해와 이듬해 부산의 부민관과 마산의 시민극장에서 상영돼 썩 좋은 흥행을 거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본지(옛 마산일보)에 실린 영화 상영 광고들. 반공영화 '내가 넘어온 38선'과 프랑스 영화 '싱고아라', 국방부가 제작한 기록영화 '정의의 진격'은 1951년 12월에 실렸으며, 프랑스 영화 '미녀와 야수'는 1952년 1월에 게재됐다.

 

 


▲1950~1970년 마산의 극장

이 무렵 마산 창동을 중심으로 현대식 영화관도 속속 문을 열기 시작했는데, 이때 지어진 극장들이 제일극장, 시민극장, 마산극장, 부림극장, 동보극장, 자유극장, 3·15회관, 태양극장이었다. 시민극장은 창동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박세봉에 의해 1946년 3월 문을 열었다. 시네마스코프(총천연색 대형화면)를 설치, 당시 최고의 흥행작이었던 '성의(聖衣)'를 상영해 화제를 모았다. 1993년에는 도내에서 처음으로 영국제 CP65 돌비 시스템을 도입해 화면과 음향에 신경을 쓰기도 했지만 2년 뒤인 1995년 '브레이브 하트' 상영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3·15회관은 3·15의거를 기념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 시절 서성동(현재의 신포동)에 지은 기념관을 영화전용상영관으로 고친 건물이다. 초기에는 외국영화를 많이 상영했고 차차 한국영화 상영을 늘렸다. 영화선정을 센스있게 잘 하거니와 위치 또한 당시 시외버스터미널 맞은편이었던 탓에 언제나 관객이 많았다. 1980년 시외버스터미널이 합성동으로 이전하고 인근에 연흥극장이 개관하면서 관객이 급감했고 급기야 1995년 '벤허' 재수입상영 후 폐관되었다. 2005년에는 건물마저 철거되었다.

 

 

★ 김대환 화백과 부림극장

"부림극장 전성기 영화간판 내 손끝에서 나왔지"

마산 극장의 전성시대를 관통해 온 한 인물이 있다. 바로 부림극장에서 20여년간 영화간판을 그려온 교당 김대환(83) 화백. 부림극장은 1947년 부림동 83번지에 지어졌던 극장으로 후에 국제극장, 강남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2004년 8월 '바람의 파이터' 상영을 끝으로 문을 닫았고 2008년 건물도 사라졌다. 그는 그 시절을 아련한 꿈인 듯 찬찬히 읊는다.

"광복 후에 이옥도라는 건축업자가 일본사람들이 남겨놓고 간 건축자재를 불하받았지. 그걸로 지은 게 부림극장이라. 그때 간판그림 그릴 사람을 뽑는다는 말을 듣고 시험을 봐서 내가 떡 붙었지. 그때 18살이었구마. 하도 날래게(빨리) 그리고 인물을 탁하게(비슷하게) 묘사를 잘하니까 제일 어린 내가 뽑힌거라."

그는 창극이 뭇 극장들의 주요 콘텐츠였던 한국전쟁 전부터 신상옥, 변장호 감독이 활개를 치던 1970년대 중반까지 부림극장에서 일했다.

"옛날에는 창극을 한국오페라라 불렀구마. 1950년 2월에 부림극장에 최고 스타 임춘앵이가 와서 '햇님과 달님' 공연을 했는데, 그때 모인 사람들이 참말로 가당찮구로 많았지."

그는 창극 무대에 드리워지는 돈초(막)에 그림을 그리다가 영화가 전성시대를 이루자 나무간판에 영화배우 얼굴을 그렸다.

"그 시절에 제대로 된 물감이 있나. 아교를 큰 솥에다가 끓여서 가루 물감을 타서 썼지. 겨울에는 아교가 딱딱했다가 날이 풀리면 걸쭉하이 녹았지."

부림극장은 한국전쟁 때 잠깐 문을 닫았다가 영사기를 도입해 재개장하며 경남 일대에서 가장 잘 지은 극장으로 인기를 끌었다. 한창 극장 주가가 좋을 땐 김 화백 밑으로 10여명의 제자들이 도제식으로 그림을 배웠다.

"전쟁 끝나고 구라파, 불란서 영화가 많이 들어왔구마. 자본주의 선전물이 많았지. 그라다가 한국영화가 차차 많아지데. 김지미, 신성일이 나오는 영화는 참말로 인기가 많았지. 영화배급사에서 스틸 사진 몇 장을 보내주면 내가 좋은 장면을 골라서 그거를 보고 그렸지. 내가 주인공을 그리면 제자들이 조연이랑 배경, 제목을 그려 넣었구마."

후에 제자들은 서울, 부산 등지의 영화관으로 취직되어 나갔고 그는 경상남북도극화협회를 만들어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협회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등장과 함께 사라졌다.

"그때는 각 극장 소속 화가가 그린 영화간판이 모두 달라서, 하나하나가 다 작품인거라. 참말로 화려했던 한 시절이구마."

 

 

경남신문 - 김유경기자 bora@knnews.co.kr

도움말= 이승기 마산문화원 영화자료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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