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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다. 준치라는 생선이 그만큼 고급이란 의미이고 오늘날의 마산 창동과 딱 어울리는 말이다.
지금은 퇴락한 모습으로 변해버렸지만, 옛날의 창동은 잘나갔던 동네였다. 번화가라서가 아니라 문화예술의 메카였기 때문이다. 그런 창동에 그것도 중심부인 창동 사거리에 '마산연극관'이 문을 연다. 온갖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다. 마산연극 100년사에 기록될 쾌거다. 돈 없는 연극인들이 사비를 털어 만든 연극관이라 작고 볼품없지만, 중요성은 엄청나다. 정확한 위치는 창동 135번지 4층이다.
이곳이 지나 온 마산연극사를 증명해 줄 공간이요, 마산연극과 관련된 각종 자료를 보존·전시할 공간인 것이다. 어찌 가슴 벅차지 않으랴.
혹자는 창동 중심부에 가난한 연극인이 진입했다는 사실 자체가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사건이라고 농담 삼아 말하지만, 그 말은 농담이 아니라 사실이다. 가난한 연극인이 땅값 비싼 창동에 둥지를 튼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흔히들 예향 마산이라 하지 않는가. 오랜 역사를 가진 예술의 도시요, 특출난 예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문학관, 미술관, 음악관이 있고 그런 공간은 전부 시에서 운영하거나 예산지원을 한다. 하지만 우리 연극관은 그렇지 않다. 연극관 설립에 소요되는 모든 비용을 우리 연극인이 부담했다.
마산 연극 역사는 장구하다. 일제강점기부터 신마산에 '환서좌(丸西座)', 구마산에 '수좌(壽座)'라는 소극장이 있었고, 특히, '수좌(壽座)'에서는 많은 연극 공연이 열렸다. 옛 시민극장, 중앙극장, 강남극장은 물론 희예식장, 한성예식장에서도 연극 공연이 펼쳐졌다. 지난 1921년 7월 18일자 <동아일보>에는 당시 일본 동경 유학생 단체였던 '동우회(同友會)'가 주최하는 동우극(同友劇) 공연이 '수좌'에서 있었으며, 그 공연은 음악과 연극이 함께 어우러진 복합공연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때 공연된 연극은 <최후의 악수>(홍영후 작)라는 단막극이고 출연은 마해송, 윤심덕, 홍영후 등이었다. 마해송은 아동문학가로, 윤심덕은 한국 최초 소프라노로, 홍영후는 작곡가 겸 바이올리니스트인 홍난파의 본명으로, 다들 당대 최고의 예인들이었다. 그들이 공연 올 정도로 마산은 알려진 예향이었다.
마산 연극이 본격적인 활동을 한 시기는 1932년부터다. 역시 <동아일보>(1932년 7월 2일자) 보도에 따르면, 1932년 6월 21일 오후 8시 시외 봉선각에서 이훈산, 김영찬, 윤종환, 박성옥, 김주산 등 10여 명이 '극예사(劇藝社)'를 조직해 창립공연을 할 예정임을 보도하고 있다. 1934년 1월 2일자에는 '극예사'의 주축 멤버였던 김지홍, 이광래 등이 주축이 되어 극단 '표현무대'를 창립하고 향토극 <만날고개>와 이광래 작 <지하층의 미담> 등을 공연할 예정이라는 보도를 하고 있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볼 때, 마산연극은 1932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초창기 마산 연극인도 일별해 본다. 대표적인 사람이 온재(溫齋) 이광래(1908∼1968)다. 마산 출신인 그는 동요 '산토끼' 작곡자 이일래의 동생이며,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에 유학한 인텔리다. 경력 또한 화려하다. <조선일보>, <중앙일보>기자 역임. 1935년 '극예술연구회' 가입. 1938년 극단 '중앙무대' 설립. 1945년 극단 '민족예술무대' 조직. 1949년 유치진과 한국연극학회 조직. 1950년 국립극장 전속극단 '신극협의회(新劇協議會)' 간사장. 1953년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학과 초대 학과장. 1957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 '촌선생(村先生)'(3막) 당선 등이 그것이다.
연극 배우이자 시인인 월초(月樵) 정진업(1916~1983)도 있다. 고향이 김해인 그의 경력을 보자. 1934년 마산상고 졸업. 일제시대때 유명했던 문예지, <문장>에 단편소설 '캬츄사에게' 발표(1939년). 이광래가 이끄는 신파극단 '황금좌'에 소속되어 전국은 물론 만주까지 순회공연을 다님. 영화 〈해연〉, 〈여인애사〉, 〈삼천만의 꽃다발〉에 출연. 화인(花人) 김수돈과 마산에서 연극 활동을 함. <부산일보> 문화부장(1951년). 경남도문화상(연극) 수상(1963년). 경남도문화상(문학) 수상(1967년). 문협 마산지부장 역임 등이 그것이다.
시인이자 연출가인 김수돈(1917~1966)도 있다. 마산 출신인 그의 호는 화인(花人)이며, 문예지 <문장> 추천(1939년), 동경 일본대학 수료(1942년), 경남여중 재직(1946년), 해인대학(현 경남대) 강사(1960년), 예총마산 부지부장(1962년), 경남도문화상 수상(1963년), 문인협회 마산지부장(1964년) 역임 등이 그의 경력이다.
셰익스피어 전공인 영문학자 배덕환(1916∼2010)도 있다. 그의 부인이 한때 신마산에서 산부인과 의사로 유명했던 전풍자 원장이며, 아들은 신부(神父)다. 그는 부산 출신이나 마산에서 대학교수를 함으로써 많은 연극인을 배출했다. 만주 대동학원 졸업. 경남대 교수. 일본 아시아 대학 객원 교수. 창원전문대학 학장. 마산연극협회 회장(1963년). 마산예총 회장(1971년) 등이 그의 경력이다.
이처럼 마산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연극도시다. '전국연극제'에서 1996년과 2008년 두 번이나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한 '극단 마산'이 있는 곳도 마산이기에 하는 말이다.
/이상용(극단 마산 대표)
'마산연극관' 개관…연극도시 마산 부활하라
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382288 - 경남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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