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정보
오랫동안 진해지역 문화사랑방 역할을 해왔던 ‘흑백다방’의 지킴이 유경아(사진) 피아니스트가 28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54세.
피아니스트 유경아
고인은 진해를 대표하는 서양화가 고 유택렬(1924~1999년)의 둘째 딸로, 유 화백이 1955년부터 2008년까지 운영하던 흑백의 간판을 고집스레 지켜왔다.
함경도 북청 출신의 유 화백이 6·25전쟁 때 거제, 부산 등을 거쳐 진해에 정착한 후 친구로부터 다방을 인수하고 흑백이라는 이름을 내걸었다. 흑백은 음악 감상실이자 연주회장, 화랑이자 소극장 역할을 한 예술인들의 산실이었다. 이중섭과 장욱진, 유치환, 서정주 등 스쳐간 예술인도 숱하다. 김춘수 시인은 이곳에서 버스 라디오에서 사연을 듣고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이라는 시를 썼고, 소설가 김탁환이 첫 작품을 탈고한 후 기쁨을 나눈 공간이기도 하다.
진해 문화사랑방 역할을 했던 흑백다방./경남신문 DB/
고인은 영국 왕립음악원에서 음악이론을 공부하다 결국 고향으로 돌아왔다. 흑백이 눈에 밟혀서였다. 생전에 고인은 “진해로 오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나고 자란 이곳이 포기가 안 된다는 점이었어요. 집안에서는 엄마와 아버지 시대의 흑백에 네가 왜 그렇게 매달리냐고 말했지만요”라고 말했다.
실내악과 연극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다목적 소극장을 만들기로 한 고인은 2000년 3월 ‘늘근 도둑 이야기’ 연극 공연을 시작으로 7월엔 베토벤 3대 소나타로 자신의 독주회를 열었다.
흑백을 찾는 이들이 고맙다며 일일이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어 기록하는 등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성품의 그는 흑백을 시민들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순탄치 않았다. 행정 절차상 영리 목적으로 운영하지 않으면 ‘흑백다방’이라는 이름을 쓸 수 없다는 말에 지역 예술가와 시민단체들이 힘을 모아 2011년 12월 ‘시민문화공간 흑백’이라는 이름으로 공간을 지켜냈다. 지난해 1월엔 유택렬미술관을 개관하며 1층 임대공간과 시너지 효과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을 것이란 기대감도 컸다. 유 화백 작품을 전시하고 살롱콘서트를 여는 등 운영에 박차를 가했지만 고인의 건강 악화 등 이유로 기대만큼 활성화되지 못했다.
올 초 고인은 1층 다방을 철수하고 잠깐의 휴식기를 가진 후 직접 공간을 운영하며 미술 전시와 연주, 연극, 시낭송 등 문화 행사를 할 계획을 밝혔다. 지난 18일엔 유택렬미술관 개관 1주년 기념연주회를 열기도 했고, 지난해 유 화백 타계 20주년 콘서트를 열지 못해 올해 9월에 꼭 성대하게 공연을 준비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치는 등 흑백과 아버지에 대한 한결같은 애정을 보여 주변의 안타까움을 더했다.
흑백 운영위원이기도 한 이월춘 시인은 “암투병으로 살이 너무 빠진 탓에 볼 때마다 눈물이 나 최근 자주 못 만났는데 죄를 지은 것 같다”며 “진해문화의 등대인 흑백다방과 유택렬미술관을 꾸려오던 고인이 세상을 떠나 너무 안타깝다”고 추모했다.
고인은 진해여고와 한양대학교 음대 피아노과를 졸업했으며, 문화공간 흑백의 운영과 유택렬미술관 대표를 맡아왔다.
정민주 기자
게시물수정
게시물 수정을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댓글삭제게시물삭제
게시물 삭제를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