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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그릇’이라는 말 앞에 한없이 겸손해진다. 사람의 됨됨이와 가능성의 크기를 그릇에 비유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름지기 ‘그릇이 커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젊은 시절부터 그릇을 키우는데 힘을 쏟는다.
하지만 리더는 ‘그릇’을 키우거나 채우는데 급급하지 않고 오히려 비울 때를 안다.
기업운영을 통해 창출한 이윤을 독차지하려고 하지 않고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진정한 리더가 있다. 바로 한국형 기부자 맞춤기금 경남1호인 오춘길(76) (주)현대정밀 회장이다.
오 회장은 지난 8일 창원시 의창구 팔용동 사옥에서 경남신문과 만난 자리에서 “저축을 했기때문에 기부를 실천할 수 있었다”며 “기부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기부의 맛을 모른다”고 말했다. 오 회장으로부터 기부에 대한 철학 등을 들었다.
오춘길 현대정밀 회장이 지난 8일 창원시 의창구 팔용동 사옥 1층 로비에 전시된 굴착기용 압축스프링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전강용 기자/
-올해 한국형 기부자 맞춤 기금 경남1호로 이름을 올렸다. 어떤 기부인가.
△아들 오정석(48) 현대정밀 대표과 함께 지난 1월31일 경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장학기금 운용을 전제로 3년간 30억원 기부를 약정했다.
기금은 저와 아내 강여옥씨의 이름을 따서 ‘(주)현대정밀 길옥(吉玉) 장학기금’으로 운용한다.
장학재단을 만들어 장학생의 60% 정도를 재단에서 선발하고, 나머지는 공동모금회에서 선발한다.
장학재단은 오래전부터 염원이 있었지만 개인이 재단을 만드는 것이 어려웠는데 다행히 제 생각과 맞아떨어지는 기부 방식이 있어 결심했다.
-통큰 기부가 이번이 처음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부끄럽지만 지난 2011년 경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1억5000만원을 기부하겠다고 약정해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소사이어티(Honor Society)에 경남8호로 가입했다.
현대정밀 이름으로도 6000만원을 내놓았다. 경남미래교육재단에 1억원, 창원시 의창구 봉림동 다문화가족, 세계선교사업회(세광교회), 경남청소년 K팝 경연대회, 육군본부 부사관 역량 강화, 39사단 등에도 지원을 했다.
-기부를 하게 된 배경을 소개해 달라.
△부모님이 항상 남을 위해 베푸는 것을 보고 자랐다. 중학교를 야간으로 다니는 등 어렵게 공부하면서 언제가는 어려운 학생들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뇌리속이 남아 있었다.
회사가 성장하고 여유가 생겼지만 결행하려니까 쉽지않았다.
먼저 집안부터 다스렸다. 육남매(3남3녀)중 5섯째였지만 큰형님, 작은 형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조카 8명을 모두 시집·장가 보냈다. 조카들이 집을 살 때도 보탰다.
다음에는 종업원들이 있어 회사가 발전한다는 생각에서 사원들을 챙겼다.
중소기업이지만 2000년부터 사원 자녀 중 고고생은 1년에 200만원, 대학생은 1년에 600만원씩의 학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사원들을 위한 복지법인도 설립해 현재 6억원의 기금이 쌓여있다. 10억원까지 채워줄 계획이다.
기금은 사원들이 3000~5000만원을 3년간 무이자로 사용할 수 있다. 대기업 만큼은 아니지만 사원들에게 성과금도 지급하고 있다.
일가친척과 사원들을 추스리고 난 뒤에 회사에서 창출된 일정한 이윤을 사회에 환원해야겠다는 바람을 실천했다. 안전장치가 필요해 5년 전에 아들, 딸, 사위, 며느리한테 일정한 금액을 준 뒤 제가 하는 기부에 대해 간섭하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받았다.
-기부하면 뭐가 좋은가.
△솔직히 자기돈 아깝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하지만 기부를 하면 스스로 기분이 굉장히 좋다. 기부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기부의 맛을 모른다. 기부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되면 왠지 불안하다. 내 자신이 용납되지 않는다.
-기부를 할 수 있었던 바탕은 무엇인가.
△저축을 하지 않았으면 결코 기부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1966년 육군(공병) 소위로 임관됐다. 당시 소위 초봉이 8650원이었다. 군에서 저축을 많이 장려했고, 금리도 28~30%로 높았다.
월급의 70%가 넘는 6100원을 떼내 1년짜리 적금을 들었다. 1년 뒤 목돈 9만3000원을 부모님께 드렸더니 안 쓰고 논을 한마지기 사서 “너 몫이다”고 줬다. 그게 ‘마약’이었다.
1966년 10월부터 지금까지 55년간 한 달도 저축하지 않는 달이 없었다. 어려울때 1~2개월 미룬 적은 있지만 월급을 받으면 절반 이상 저축한다.
한달에 500만원 저축해 6000만원을 찾으면 기분 참 좋다. 내돈 넣고 내돈 찾는 것이지만 목돈이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기분이다.
저축 덕분에 여태까지 기부할 수 있었다. 2003년 저축대상을 받았다. 당시 금융위원회에서 직원들이 전산화가 된 이후 저축한 내역을 다 뽑아왔었다.
저축대상 수상에 대해 0.0001%도 양심의 가책도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직원들에게도 말한다. 저축은 쓰고 남은 것을 하는 게 아니다. 쓰고 싶은 것 20~30% 적게 쓰고 계획을 해서 저축하라고.
-앞으로 기부와 관련된 계획은.
△저의 뜻을 이어받아 회사 공동대표인 아들도 2015년 아너소사이어티(경남 52호)에 가입했다.
앞으로 교회 권사인 아내도 아너소사이어티에 가입토록 하겠다. 아내는 교회에 다양한 봉사활동과 지원을 하고 있다. 모스크바 등 4곳에 교회를 건립해 기증했다.
-현대정밀에 대해 소개해 달라.
△1978년 육군 소령으로 예편한 뒤 이듬해 4월 고향 창원에서 기계부품 제조업체 현대정밀을 창업했다.
대·중·소형 굴착기에 장착되는 ‘압축 스프링(Tension Spring Assembly)’은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해 볼보그룹 코리아에 독점 납품하고 있다.
또 지게차의 조향장치를 독일 클라크에 납품하고 있다. 창원 본사에 50명, 중국 상해 현대정밀기계(유)에 50명의 직원을 두고 있다.
-최고경영자로서 하고 싶은 말은.
△현대정밀을 창업한지 지난 1일로 꼭 41년이 됐다. 그동안 열심히 정직하게 사업을 했다고 자부한다.
이 부분에 대해 어느누구한테 양심의 가책이 없다. 왕도는 없다. 선행을 많이 하면 행복해진다. 부지런히 일하고 저축하면 부자가 된다.
☞ 오춘길 회장은?
1944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난 탓에 아르바이트를 하며 야간중학교를 졸업한 뒤 친구들보다 1년 늦게 마산공고에 들어갔다. 재야운동가 장기표씨가 고교 동기로 2년간 같은 반을 했다. 육군사관학교를 가고 싶었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갑종장교로 군 생활을 시작해 13년간 복무했다. 1979년 고향 창원에서 기계부품 제조업인 현대정밀을 창업해 40여년만에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기업으로 키웠다. 2011년에 경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1억5000만원을 기부해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이 됐다. 2013년 제50회 저축의 날에 저축대상을 수상해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지난 1월 30억원 기부를 약정해 경남 1호(전국 8번째) 한국형 기부자맞춤기금에 이름을 올렸다. 지난 2월에는 마산공고 역대회장과 총동창회에서 수여하는 ‘자랑스러운 동문’상을 받았다.
김진호 기자 kimjh@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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