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정보
내용
시간과 나의 인생 - 황수원(거제박물관장/경남 박물관협의회장)
2010년 새해가 밝았다. 양력으로야 2010년이지만 음력으로 보는 경인년(庚寅年)은 설을 쇠어야 시작되는 것이니 며칠이 남긴 남았지만 모두가 경인년 한 해를 격려하고 축하하면서 이메일과 전화 메시지나 연하엽서를 보낸다.
박물관에서도 엊그제 꽤 많은 분량의 연하엽서를 보냈다. 돈이 좀 들긴 하지만 전화메시지로 보내는 가벼움을 피하고, 인터넷 메일을 보낼 경우 이를 아직 읽지 않으시는 분들이 주위에 많아 부득이 연하인사는 엽서로 하는 경우가 많다.
연례행사처럼 하는 이 일을 두고 왜 간단히 처리하지 않느냐고 악의(惡意)없이 꼬집어 대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보낼 분들의 이름과 주소를 한 번이라도 더 되새기고, 얼굴을 떠올리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그들도 안다. 이렇게 한 해를 마무리하고 또 한 해를 시작하는 것이다.
어제 뜨는 해나 오늘 뜨는 해나, 그리고 어제의 시간이나 오늘의 시간이 다를 바야 없겠지만, 연속되는 시간을 두고도 구태여 이렇게 한 해를 구획하는 이유는 흩어진 마음을 다잡고 새로운 결심으로 다시 시작해 보라는, 그리고 희망을 가지고 살아 보라는 의미인 것이다.
되돌아보면 삶의 여유를 갖고 살자고 친구나 아내에게 또는 자식들에게도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근년의 생활을 살펴보면 정작 자신은 그렇게 여유롭게 살지 못한 것 같다. 아마 결코 떨쳐버리지 못한 욕심 때문일 것이다.
일상(日常)은 나도 모르게 나를 옥죄는 사슬이 되고,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려면 노예의 발목에 채워진 족쇄처럼 무겁기만 하다. 그래서 저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라는 말을 나도 한번쯤 해 보고 싶다.
그러나 이 역시 그냥 꿈일 것이다. 이맘때쯤 한번 해보는 지나가는 소리일 것이다.
12월 25일에 탄생하신 예수님과, 음력 4월 초파일에 강림하신 부처님 등을 친구처럼 여기지 않는 이상, 나는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를 무시해 버릴 만큼 철저하게 타락하지 못해도 나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내 안의 나를 나는 안다. 그래서 부끄러운 것이다. 그래서 아직은 더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게 주어진 매 순간이 아까운 것이다.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시간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간이 간다. 그리고 온다. 많은 사건을 싣고 떠나고 또 다가온다. 눈물도 웃음도, 사랑도 우정도, 욕망도 애증도 모두 담아, 가고 또 온다.
2010년이라는 시간의 배가 이제 막 내 앞에 다가왔다. 어릴 적 즐겨 보았던 만화영화 ‘은하철도 999’의 승객처럼 나도 저 배에 몸을 싣는다. 어디로 갈지도, 그 여행이 어디서 끝날지도 모르면서….
시간의 조정자가 되긴 틀렸고, 시간의 관찰자 되고 싶어 했던 욕망을 뒤로 한 채 그냥 습관적으로 그 배에 몸을 싣는다. 양손에 무거운 가방을 들고 두꺼운 안경과 영수증이 가득한 자루를 목에 걸고, 족쇄 채워진 발목에 너덜너덜한 구두를 신고 시간의 배로 가는 사다리를 오른다.
내가 서 있던 곳을 뒤돌아보는 순간 그곳도 역시 유랑하는 배였다는 것을, 그리고 버렸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줄줄이 엮이어 뒤를 따라오고 있는 것을 나는 본다. 그곳엔 정말로 잊어버리고 싶었던 과거와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순수함과 꾸미지 않은 웃음이 희망이라는 열쇠와 함께 엮이어 있다.
그렇다! 인생은 어차피 토털리티(totality)다. 버리지 못했다면 필요할 때도 있다. 그러니 구태여 버릴 필요도 없다. 이것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한 예수와, 세상의 부와 명예, 가족을 버리고 출가를 감행했던 부처와 내가 다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인간이다.
황수원(거제박물관장)
- 출처: 경남신문 여론마당 -
2010년 새해가 밝았다. 양력으로야 2010년이지만 음력으로 보는 경인년(庚寅年)은 설을 쇠어야 시작되는 것이니 며칠이 남긴 남았지만 모두가 경인년 한 해를 격려하고 축하하면서 이메일과 전화 메시지나 연하엽서를 보낸다.
박물관에서도 엊그제 꽤 많은 분량의 연하엽서를 보냈다. 돈이 좀 들긴 하지만 전화메시지로 보내는 가벼움을 피하고, 인터넷 메일을 보낼 경우 이를 아직 읽지 않으시는 분들이 주위에 많아 부득이 연하인사는 엽서로 하는 경우가 많다.
연례행사처럼 하는 이 일을 두고 왜 간단히 처리하지 않느냐고 악의(惡意)없이 꼬집어 대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보낼 분들의 이름과 주소를 한 번이라도 더 되새기고, 얼굴을 떠올리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그들도 안다. 이렇게 한 해를 마무리하고 또 한 해를 시작하는 것이다.
어제 뜨는 해나 오늘 뜨는 해나, 그리고 어제의 시간이나 오늘의 시간이 다를 바야 없겠지만, 연속되는 시간을 두고도 구태여 이렇게 한 해를 구획하는 이유는 흩어진 마음을 다잡고 새로운 결심으로 다시 시작해 보라는, 그리고 희망을 가지고 살아 보라는 의미인 것이다.
되돌아보면 삶의 여유를 갖고 살자고 친구나 아내에게 또는 자식들에게도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근년의 생활을 살펴보면 정작 자신은 그렇게 여유롭게 살지 못한 것 같다. 아마 결코 떨쳐버리지 못한 욕심 때문일 것이다.
일상(日常)은 나도 모르게 나를 옥죄는 사슬이 되고,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려면 노예의 발목에 채워진 족쇄처럼 무겁기만 하다. 그래서 저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라는 말을 나도 한번쯤 해 보고 싶다.
그러나 이 역시 그냥 꿈일 것이다. 이맘때쯤 한번 해보는 지나가는 소리일 것이다.
12월 25일에 탄생하신 예수님과, 음력 4월 초파일에 강림하신 부처님 등을 친구처럼 여기지 않는 이상, 나는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를 무시해 버릴 만큼 철저하게 타락하지 못해도 나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내 안의 나를 나는 안다. 그래서 부끄러운 것이다. 그래서 아직은 더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게 주어진 매 순간이 아까운 것이다.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시간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간이 간다. 그리고 온다. 많은 사건을 싣고 떠나고 또 다가온다. 눈물도 웃음도, 사랑도 우정도, 욕망도 애증도 모두 담아, 가고 또 온다.
2010년이라는 시간의 배가 이제 막 내 앞에 다가왔다. 어릴 적 즐겨 보았던 만화영화 ‘은하철도 999’의 승객처럼 나도 저 배에 몸을 싣는다. 어디로 갈지도, 그 여행이 어디서 끝날지도 모르면서….
시간의 조정자가 되긴 틀렸고, 시간의 관찰자 되고 싶어 했던 욕망을 뒤로 한 채 그냥 습관적으로 그 배에 몸을 싣는다. 양손에 무거운 가방을 들고 두꺼운 안경과 영수증이 가득한 자루를 목에 걸고, 족쇄 채워진 발목에 너덜너덜한 구두를 신고 시간의 배로 가는 사다리를 오른다.
내가 서 있던 곳을 뒤돌아보는 순간 그곳도 역시 유랑하는 배였다는 것을, 그리고 버렸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줄줄이 엮이어 뒤를 따라오고 있는 것을 나는 본다. 그곳엔 정말로 잊어버리고 싶었던 과거와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순수함과 꾸미지 않은 웃음이 희망이라는 열쇠와 함께 엮이어 있다.
그렇다! 인생은 어차피 토털리티(totality)다. 버리지 못했다면 필요할 때도 있다. 그러니 구태여 버릴 필요도 없다. 이것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한 예수와, 세상의 부와 명예, 가족을 버리고 출가를 감행했던 부처와 내가 다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인간이다.
황수원(거제박물관장)
- 출처: 경남신문 여론마당 -
0
0
게시물수정
게시물 수정을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댓글삭제게시물삭제
게시물 삭제를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