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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1545∼98) 장군을 기리는 충남 아산 현충사(사적 제155호)는 학창시절 누구나 한 번쯤 수학여행 코스로 다녀온 기억이 있을 겁니다. 현충사에는 충무공이 남긴 유품 가운데 국보 1점과 보물 20점 등 값진 문화재가 즐비하답니다. 한 인물과 관련된 국가지정 문화재를 한 공간에서 이렇게 많이 소장하고 있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든 사례랍니다.
충무공이 임진왜란 때 쓴 일기인 ‘난중일기’(국보 제76호)는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28세에 무인 선발시험인 훈련원별과에 응시했으나 달리던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실격하였고, 4년 뒤 무과에 급제해 권지훈련원봉사로 벼슬을 시작한 것부터 임진왜란 당시 옥포대첩, 노량진해전, 당항포해전, 한산대첩, 명량대첩 등 전투 상황까지 상세히 적었답니다.
보물은 장군이 전쟁 중 직접 사용한 길이 197.5㎝의 ‘장검’(326-1호·사진), 충무공 사후인 1604년 선조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장군에게 내린 ‘선무공신교서’(1564-1호), 앞서 1576년 이순신이 무과 병과에 급제해 선조로부터 받은 ‘무과홍패’(1564-7호), 1643년 선조가 이순신에게 충무공(忠武公)이라는 시호를 내린 ‘증시교지’(1564-12호) 등이 대표적입니다.
현충사는 이순신이 전사한 지 100여년이 지난 1706년(숙종 32년) 충무공의 사당으로 건립됐답니다. 사당 건립 이듬해 숙종은 현충사(顯忠祠)라는 현판을 하사했지요. 그러나 현충사는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고 말았답니다. 당시 대원군은 이순신을 배향(配享)하는 사당으로는 임진왜란 때 삼군수군통제사가 있던 경남 통영의 충렬사만 남겨두었죠.
그러다 구한말 나라가 다시 존망의 위기에 놓였을 때 이순신이 새롭게 부각됩니다. 신채호는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이순신의 전기를 연재해 일본의 침략으로 고통에 빠진 민족을 구할 수 있는 용기를 북돋았답니다. 이후 많은 민족 열사들이 이순신 전기를 펴내면서 충무공은 점차 식민지 시대를 종식시킬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았고요.
일제강점기에는 충무공 종가의 가세가 기울어 아산의 이순신 묘소 등이 은행에 저당 잡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게 될 위기에 처했으나 국민들의 성금으로 빚을 갚고 1932년 6월 5일 현충사 중건 낙성식이 열렸지요. 광복 이후 6·25전쟁 등 숱한 국난 속에서도 충무공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로 남았고, 현충사는 66년 박정희 대통령의 성역화사업으로 오늘에 이르렀답니다.
지난 4월 28일 충무공 탄생 466주년을 맞아 현충사에 ‘이순신기념관’이 개관됐습니다. 임진왜란과 충무공을 주제로 한 2개의 전시실과 노량해전을 4D로 재현한 영상실이 꾸며졌지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했던 충무공의 호령이 생생하게 들려오는 듯합니다. 6월 호국의 달에 가볼만한 유적지랍니다.
문화과학부 선임기자
충무공이 임진왜란 때 쓴 일기인 ‘난중일기’(국보 제76호)는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28세에 무인 선발시험인 훈련원별과에 응시했으나 달리던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실격하였고, 4년 뒤 무과에 급제해 권지훈련원봉사로 벼슬을 시작한 것부터 임진왜란 당시 옥포대첩, 노량진해전, 당항포해전, 한산대첩, 명량대첩 등 전투 상황까지 상세히 적었답니다.
보물은 장군이 전쟁 중 직접 사용한 길이 197.5㎝의 ‘장검’(326-1호·사진), 충무공 사후인 1604년 선조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장군에게 내린 ‘선무공신교서’(1564-1호), 앞서 1576년 이순신이 무과 병과에 급제해 선조로부터 받은 ‘무과홍패’(1564-7호), 1643년 선조가 이순신에게 충무공(忠武公)이라는 시호를 내린 ‘증시교지’(1564-12호) 등이 대표적입니다.
현충사는 이순신이 전사한 지 100여년이 지난 1706년(숙종 32년) 충무공의 사당으로 건립됐답니다. 사당 건립 이듬해 숙종은 현충사(顯忠祠)라는 현판을 하사했지요. 그러나 현충사는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고 말았답니다. 당시 대원군은 이순신을 배향(配享)하는 사당으로는 임진왜란 때 삼군수군통제사가 있던 경남 통영의 충렬사만 남겨두었죠.
그러다 구한말 나라가 다시 존망의 위기에 놓였을 때 이순신이 새롭게 부각됩니다. 신채호는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이순신의 전기를 연재해 일본의 침략으로 고통에 빠진 민족을 구할 수 있는 용기를 북돋았답니다. 이후 많은 민족 열사들이 이순신 전기를 펴내면서 충무공은 점차 식민지 시대를 종식시킬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았고요.
일제강점기에는 충무공 종가의 가세가 기울어 아산의 이순신 묘소 등이 은행에 저당 잡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게 될 위기에 처했으나 국민들의 성금으로 빚을 갚고 1932년 6월 5일 현충사 중건 낙성식이 열렸지요. 광복 이후 6·25전쟁 등 숱한 국난 속에서도 충무공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로 남았고, 현충사는 66년 박정희 대통령의 성역화사업으로 오늘에 이르렀답니다.
지난 4월 28일 충무공 탄생 466주년을 맞아 현충사에 ‘이순신기념관’이 개관됐습니다. 임진왜란과 충무공을 주제로 한 2개의 전시실과 노량해전을 4D로 재현한 영상실이 꾸며졌지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했던 충무공의 호령이 생생하게 들려오는 듯합니다. 6월 호국의 달에 가볼만한 유적지랍니다.
[이광형의 ‘문화재 속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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