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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인들 잔치에 대통령이 긴장한 까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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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동·오동동 이야기] 소박하게 시작된 자리…명사 모여들자 혹시 '반정부 행사?' |
전국의 많은 도시 중 유독 우리 마산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예술행사가 하나 있으니 바로 '대동제'가 그것이다. 음력 정월 초나흘부터 보름까지, 마산 예인들이 각자 소장하고 있는 그림이나 시화(詩畵)를 '고모령'이란 주점에 걸어놓고 원로 예술인을 초청하여 세배도 드리고 조촐한 술판도 곁들이는 일종의 '예술인 잔치'다.
대동제 하니까 무슨 거창한 행사 같지만, 초창기의 대동제는 너무도 소박하고 조촐한 예인들의 만남이었다. 특히 대동제가 조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겨우 탁자 대여섯 개를 갖춘 작은 주점 고모령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그런 좁은 공간에서 열린 대동제가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았으니 그 배경은 무엇일까.
대동제는 2012년 올해로 벌써 25회를 맞이했다. 대동제를 탄생시킨 고모령의 주인은 어떤 배포를 가진 사람일까. 혹시 강호무림의 고수는 아닐까. 선술집 주모라면 한 푼이라도 악착같이 모으는 것이 보통인데도, 그녀는 오히려 남에게 베푸는 것은 기본이요 돈 안 되는 대동제 같은 행사를 주선하는 데는 항상 발 벗고 나섰기에 하는 말이다.
올해 열린 제25회 '대동제' 개막식장에서 왼쪽부터 박춘성 화가, 이상용 대표, '고모령' 문자은 여사, 허청륭 화가, 이광석 시인. /나상호
고모령과 대동제는 불가분의 관계다. 고모령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매년 연말 무렵이 되면 전국의 내로라 하는 예인들이 다가오는 정초에도 대동제를 여는지, 열면 며칠부터 여는지 등등을 물어왔단다. 그리고 그들은 어김없이 대동제에 참석했단다. 통영의 임종안(서각가), 진주의 설창수(시인), 서울의 김재규(마산출신 화가), 진해의 유택열(화가), 부산의 변창헌(서예가) 등등이 그들이란다.
대동제의 탄생 일화도 흥미롭다. 1987년 연말에 마산 예인 몇몇이 고모령에 집결한다. 다가오는 음력설에 어른들을 고모령에 모셔 놓고 합동으로 세배를 하자는 의논을 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단순히 세배만 하는 것은 무미건조하니, 화가들이 각자 1호 크기(우편엽서 크기) 정도의 작품을 한 점씩 가지고 와서 걸어놓으면 좀 운치가 있지 않을까 의논한다. 그리고 "우리가 마산을 예향답게 만들자"는 의기투합도 한다.
고모령 주인 문자은과 화가 허청륭·박장근, 시인 김미윤 등이 그 주축멤버였고, 화가 최운·김영진·정상돌, 시인 정진업, 언론인 이순항 등은 당시 그들의 멘토였다. 그들은 '문화의 지방자치화'라는 제법 거창한 슬로건을 내걸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그 이름도 찬란한 대동제가 탄생한 것이다.
제1회 대동제는 1988년 정월 초나흘부터 시작된다. 1988년이면 '88 올림픽'이 서울에서 열린 해다. 서울에서는 올림픽도 열리고 하니, 변방에 있는 마산 촌놈들이 이런 기회에 '예향 마산'의 본때를 보여주자고 오기를 부렸단다.
위쪽사진은 제1회 대동제 당시 황선하 시인, 정상돌 화가, 김미윤 시인(왼쪽부터)의 모습. 아래쪽 사진은 서성동 '고모령'에서의 제11회 대동제 개막식 장면. 앞줄 오른쪽부터, 송인식(동서화랑 관장), 여진(언론인), 조민규(합포문화동인회장), 정목일(수필가), 뒷줄 선 사람이 김혁규 당시 경남도지사. /김병규
수성동 고모령에서 매년 대동제가 열리고 그 대동제가 차츰 전국적으로 입소문을 타자, 어느 순간 주요 TV 뉴스에서도 대동제를 보도하게 된다. 그 뉴스를 본 전두환 대통령이 마산의 대동제가 무슨 반정부 행사가 아닌가 싶어 진상파악을 지시하자 청와대에서는 난리가 났었다고 한다. 그 불똥이 경남도와 마산시로 튀었음은 불문가지.
당시 최일홍 경남도지사와 마산시장이 고모령에 온 것까지는 좋았으나, 당시 고모령은 열악한 시설의 무허가 선술집이었으니…. 그 다음날 당장 영업정지와 함께 '70여만 원의 벌금'이라는 날벼락을 맞았단다. 그래서 급기야 화가들이 나서서 벌금을 모으기 위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단다. 그 사건으로 인해 수성동 고모령은 결국 문을 닫게 되고, 또다시 서성동 쪽으로 옮기게 된다. 세칭, '서성동 고모령'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대동제의 특징 중 하나는 1회 때부터 원로 예인 두 분이 대회장을 맡는 '공동대회장' 체제라는 점이다. 당시 마산에는 출중한 예인이 너무 많아서 한 명의 대회장으로는 그 수요를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25년 동안 대동제의 공동대회장을 맡은 면면을 살펴본다. 훗날의 기록을 위해서다.
1~2회는 정상돌(미술)과 황선하(문학), 3~4회는 이광석(문학)과 김영진(미술), 5~8회는 권영호(미술)와 이광석(문학), 9~18회는 이광석(문학)과 변상봉(미술), 19~20회는 이필이(무용)와 박춘성(미술), 21~24회는 정양자(무용)와 최명환(미술), 그리고 금년 25회는 김미윤(문학)과 성낙우(미술)가 그들이다.
그리고 '대동제'라는 글씨는 1회 때부터 서양화가 허청륭이 써 왔는데, 한때 그 글씨체는 '땡초체'로 통했다. 글자 모양이 워낙 독특하고 예술적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누가 쓴 것이냐고 묻자, '땡초'라는 유명한 스님이 썼다고 둘러댄 것이 화근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은 그 말을 믿었지만, 사실은 허청륭 화백의 별호가 '땡초'라서 '땡초체'라 불린 것이다.
서성동 고모령이 문을 닫고 난 후 고모령은 마산에서 영원히 종언을 고하지만, 대동제는 장소를 대우백화점 갤러리로 옮겨 매년 열리고 있다. 이젠 마산시도 없어지고 고모령도 사라졌으나, 대동제만은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대동제여 영원하라!
/이상용(극단 마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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