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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공산주의 진영 간의 냉전이 격화되던 지난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우리나라에도 대공산권 심리전과 친미·반공 의식 고취를 위한 미국의 선전기구, 즉 주한미국공보원(USIS, 이하 미공보원)이 존재했다.
노동문제 전문가이면서 영화 등 '문화정치'영역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여온 이성철 창원대 교수(사회학과)가 창원을 주무대로 한 미공보원의 상세 활동내용과 한국·경남 영화사에 끼친 영향 등을 최초로 집중조명한 논문(미발표)을 펴냈다.
1950년대 미공보원의 영화제작 시설이 창원에 있었다는 사실은 그간 일부 증언과 연구를 통해 드문드문 알려져 왔다. 하지만 충분한 근거 없이 기억 등에 의존해 정리되다 보니 지나치게 단편적이었고, 또 오류가 적지 않았다는 게 이성철 교수의 설명이다. 이 교수는 당시 언론보도와 창원 소재 '상남영화제작소' 초대 소장인 리엄 릿지웨이를 비롯한 현지 근무자 등의 증언을 바탕으로 잊힌 역사를 하나하나 발굴해나간다.
1962년 <동아일보>에 실린 창원 소재 상남영화제작소 전경. |
이 교수가 최근 <경남도민일보>에 최초 공개한 논문 <지역 영화사 오디세이 : 1950년대 경남지역 미국공보원(USIS)의 영화제작을 중심으로>에 따르면, 미공보원의 전신인 미군정공보국이 설치된 시기는 1947년이었다. 서울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미공보원은 그 후 1950년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경남으로 이전하게 된다. 안전을 위해 미공보원 전체가 진해로 거점을 옮긴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뒤인 1952년 초, 미공보원 영화과는 당시 창원 상남면 쪽에 다시 새 터전을 마련하게 되는데, 이 역시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시설을 보호하기 위한 측면이 컸다. 부산과 가까운 진해는 북한군의 접근이 용이해 안전이 보장될 수 없었던 것이다.
현재의 창원시 중앙동 인근 주택가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상남영화제작소는 이후 1967년까지 무려 15년 동안 미국의 대내외 핵심 선전기구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곳에서 제작된 주간 '뉴스영화'(리버티 뉴스)만 721환에 달했고, 특정 메시지 전달을 위한 문화영화도 수백 편이 만들어졌다.
한국영화 산업적·인력적 기반이 되다
특히 텔레비전이 대중화되기 전인 1950~1960년대는 대중매체로서 영화의 영향력이 거의 절대적일 만큼 강했던 시기이다. 미공보원 제작 영화의 배포 범위가 남한 정부의 그것보다 4배 이상 컸다는 연구결과 등까지 참조하면, 당시 상남영화제작소의 위상은 현재의 KBS·MBC 같은 지상파 방송사 이상이었을지 모른다.
이성철 교수가 상남영화제작소를 주목하는 이유는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영화제작소의 활동과 그 내용이 비록 미국적 관점이 투영된 것이기는 하지만 당시 한국의 시대 상황을 비교적 충실하게 담아내고 있고, 이후 한국의 영화제작 환경 등에 끼친 영향이 지대했다"는 데서 큰 의미를 찾는다.
이를테면 당시 영화제작소에 근무하던 한국인 직원은 모두 85명에 달했는데, 초기엔 영화 기술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상과 프린팅부터 16밀리 필름의 35밀리 확대 등의 작업을 15년 이상 하면서 나중에는 미공보원의 주문작업이 있을 정도로 숙련도가 높아졌다.
그들 중에는 <하녀>, <고려장>, <화녀> 등을 만든 한국영화의 거장 고 김기영 감독도 있었다. 김 감독은 1955년 <죽엄의 상자>로 상남영화제작소에서 자신의 영화 여정을 시작한다.
이 교수는 "미공보원에 의해 시작된 영화제작소였지만 한국영화의 산업적·인력적 기반이 탄생하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이는 인근의 부산국제영화제가 상대적으로 지니고 있지 못한 역사적인 유산"이라고 평가하면서 창원의 새로운 문화브랜드로서 가능성까지 모색한다. "현재 창원의 문화브랜드는 무엇일까? 그동안 창원은 이렇다 할 만한 문화적 가치를 지닌 브랜드를 창출하지 못했다. 경남지역 영화인들의 역사자료 발굴과 후속 연구 확대가 필요하다. 경남영상위원회 등은 추후 관련된 프로젝트를 활성화시켜야 한다."
'지방신문 편집자' 일상도 담아
"당시 한국의 시대 상황을 비교적 충실하게 담아내고 있다"는 이성철 교수의 평가 또한 소중하다. 상남영화제작소가 제작한 문화영화 중에는 1950~1960년대 경남, 특히 마산의 사회상을 읽을 수 있는 영화도 있었다. 1955년작 <거리의 등대>와 1958년작 <지방신문 편집자>가 그것이다.
제목 자체만으로 흥미로운 <지방신문 편집자>에 관해 그간 알려진 사실은 '부산일보사'를 배경으로 촬영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교수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당시 마산에 자리 잡고 있던 '마산일보사'가 소재의 중심이었다. 각본과 감독은 훗날 <팔도강산>(1967년) 등을 연출한 창원 출신의 배석인이 맡았다.
<지방신문 편집자>가 여러 면에서 예외적이고 이색적인 것은 소위 '자유진영'의 이데올로기 선전에서 다소 비켜나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 주인공인 마산일보사 편집국장의 일상과 대내외적 역할부터 신문제작 과정, 지방신문사의 생존법, 시민들의 언론관, 환경 공해 등 사회문제까지 매우 다양한 당대의 풍경과 생활상이 나타난다. <거리의 등대>는 마산역전에 있던 결손·피란민 가정 자녀들 천막학교인 '대한소년문화원'을 다루고 있다. 물론 영화 내내 반공과 재건의 이미지가 강하게 나타나지만, 역시 당시 마산사회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모자람이 없다고 이성철 교수는 말한다.
이 교수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자 대면하기와 끌어안기"라며 "1950년대 경남 마산을 배경으로 제작된 미공보원의 영화를 특정 이데올로기의 입장에서만 조망할 것이 아니라 현 시점에서 이를 어떻게 문화적 자원과 자양분으로 전환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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