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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향기] 박희태 국회의장
검사 꿈꾸던 남해 섬소년, 대한민국 입법부 수장되다
-경남신문-
남해 물건리에서 미조항으로 가는/삼십리 물미해안/허리에 낭창낭창 감기는 바람을 밀어내며/길은 잘 익은 햇살 따라 부드럽게 휘어지고/섬들은 수평선 끝을 잡아/그대 처음 만난 날처럼 팽팽하게 당기는데(고두현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중에서)
소년은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바다는 오히려 슬픔으로 다가왔다. 파도처럼 그렇게 마음속 풍랑이 일었다 잔잔해지기를 반복했다.
검사를 꿈꾸던 소년에게 현실의 벽은 너무 높았다. 명문중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지만 가정형편이 여의치 않아 유학은 꿈도 못꿨다.
낙담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 소년이 60년 후 대한민국 입법부 수장이 됐다. 당시에는 자신도, 주변의 그 누구도 상상조차 못했던 그야말로 ‘꿈’이었다.
1938년 남해군 이동면에서 태어났다. 남해 출신 시인의 노래처럼 쪽빛 바다를 품은, 그림 같은 풍광을 간직한 곳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천혜의 자연에 견주기엔 삶은 너무 팍팍했다.
박 의장은 2남4녀 중 넷째다. 딸 셋 이후 낳은 그야말로 ‘귀한’ 아들이었다. 많은 사랑을 받은 때문인지 모친에 대한 아련함도 컸다.
“국회의원 3선 당선 이후에 아흔둘의 연세로 돌아가셨는데, 평소 드린 용돈을 모아 두셨다가 선거 때면 보태 쓰라고 손에 꼭 쥐어주셨다. 극구 사양하면 이걸 써야 성공한다고 우기셨는데….” 잠시 말문을 닫았다.
박 의장이 법조인의 길을 선택한 것은 어린 나이에 갑작스럽게 당한 부친의 별세가 계기였다. “객지에서 양복 기술을 배워 한평생 조그마한 양복점을 경영하며 가난과 싸우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라고 선친을 회고했다. 박 의장이 초등학교 4학년쯤 작고했다. “갑자기 변사사건이 발생했는데 검사 지휘하에 장례를 치를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검사라는 직업에 대해 알게 됐고 그 길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배경도 돈도 없는 내가 사회를 헤쳐나가려면 사법고시 합격 외에는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년은 중학교 진학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당시 명문 경남중 교복 소매와 모자에 장식된 두 줄의 흰선, 즉 ‘쌍백선(雙白線)’은 선망의 대상이었어. 그때는 국가시험을 쳤는데 경남중학교에 지원해 8등으로 합격했지. 그런데 문제는 1951년이라 6·25전쟁이 한창인데다 유학할 형편이 못돼 등록을 못한 거지.”
경남중 진학이 좌절된 채 한동안 쉬었다. 그런데 마침 “인재를 놀릴 수 없다”며 남해중학교에서 특별입학을 허가했다.
박 의장은 아직도 당시 중학교 국가시험 문제를 기억했다. 명석함이야 검증받았지만 어린 가슴에 남은 아쉬움이 너무 컸던 때문으로 짐작된다.
“시골에서 보낸 초·중학교 시절은 다 비슷하지. 공 차고 뛰어놀다가 해가 저물어야 집에 들어가고, 그야말로 ‘야생생활’이지.(웃음) 중학교 때는 왕복 40리를 걸어다녔는데 그때 기초체력이 다져진 것 같아.”
전쟁이 끝나고 경남고교로 진학했다. 10살 터울의 둘째 누이가 결혼해 부산에 신접살림을 차린 덕을 봤다. 300명 입학정원에 40등 정도 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고교 3년간 누님댁에서 생활했는데 매부는 당시 가난한 공무원으로 단칸방에서 같이 살았어. 지금 생각하면 미안하기 짝이 없지….”
고교시절 단연 수위권을 달렸다. “고 3때 모의시험을 봤는데 전교 4등한 적도 있고 항상 10등 이내에는 들었지. 영어 과목은 1등을 한 적도 있다”고 했다.
서울법대를 진학했지만 가난은 더욱 무겁게 그를 짓눌렀다. “서울에서 유학은 더 힘들었지. 항상 쪼들린 생활이었으니까. 서너달 하숙하다 돈이 떨어지면 고향으로 가 고시공부를 했어. 방학이 끝나고 등록할 즈음이면 목돈 마련을 위해 어머니께서 이곳저곳을 다니시며 돈 빌리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
박 의장은 서울법대를 졸업하던 23살 때 사법고시에 합격, 어린 시절 꿈꾸던 검사의 길을 걸었다.
검찰 사상 드물게 춘천·대전·부산 등 지검장을 3번이나 지냈다. 부산 고검장으로 ‘잘나가던’ 시절, 갑자기 정치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인재 많기로 소문난 사법고시 13기의 선두주자였던 만큼 주위의 놀라움도 컸다.
본인의 극구 사양에도 당시 민정당 사무총장이자 서울법대 선배였던 심명보 사무총장이 영입에 공을 들였다는 후문이다.
13대 국회 4·26총선이었다. 4월 1일 사표를 냈으니 20여 일간의 선거운동이 고작이었다. 그는 현역이던 통일민주당 문부식 의원에 1만여 표 차이로 승리를 거뒀다.
당시 선거는 야풍(野風)이 강했다.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의 바람이 경남과 부산을 휩쓸었다. 여당인 민정당 후보 중 경남지역은 절반 정도, 부산은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낙선했다.
얼떨결에 정치권에 발을 들였지만 이후 화려한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18대 국회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다. 물론 중간중간 우여곡절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국회에 입성한 지 6개월 만에 대변인으로 발탁됐다. 초선인데다 비언론인 출신이 여당 대변인을 맡은 것은 이례적이다. 원내부총무를 하면서 기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속칭 ‘기자실 공천’으로 발탁됐다는 후문이다.
순발력과 풍부한 어휘력으로 1988년부터 문민정부 출범 직후까지 4년3개월간 대변인 자리를 지켰다. 헌정 사상 최장수 대변인이다. 품격 있는 촌철살인의 논평은 아직도 회자된다. ‘총체적 난국’ ‘정치 9단’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 등 인구에 회자되는 많은 유행어를 만들어 명성을 날렸다.
박 의장은 딱 한 권의 저서가 있다. 주변의 요청이 많았으나 “경망스럽게 무슨 책을….” 이라며 오히려 면박을 줬다. 2006년 펴낸 한 권의 책 이름도 ‘대변인’이다. 그만큼 대변인에 대한 애착은 남다르다.
박 의장은 맛깔스럽고 탁월한 조어능력의 소유자다. 그는 “언어 순발력은 어머님의 영향을 많아 받았다. 비록 촌로(村老)였지만 순간적인 재치와 재미있는 말씀을 곧잘 하시는 분이셨다”고 회고했다.
대변인을 끝내고 정계 입문 5년 만에 법무부 장관에 발탁됐다. 국회법사위원장, 운영위원장, 원내총무, 한나라당 부총재, 최고위원, 대표최고위원, 국회 부의장 등을 거쳤다.
정치인생의 가장 큰 고비는 2008년 4월 18대 총선 낙천이었다.
박 의장은 지난 대선 경선 때 이명박 캠프 선대위원장을 맡으며 정권 창출의 핵심 역할을 했다. 이 대통령에게 정치적 조언을 했던 ‘6인 회의’ 멤버다. 그럼에도 공천에서 쓴잔을 마셨다.
“낙천에 대한 서운함이야 컸지만 말 한 마디 안했다. 언론의 요청에도 한 마디 안했다. 대통령 경선 선대위원장이었는데 공천 탈락을 생각이나 했겠나. 속으로 참자, 참자, 또 참자고 되뇌었다.”
그는 낙천의 충격에도 당의 요청을 받아들여 선대위원장을 맡아 분골쇄신했다. 인고의 시간을 보낸 덕분인지 3개월 만인 7월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선출돼 재기했다. 하지만 원외대표라는 한계를 들어 당내 ‘흔들기’는 계속됐다. 이런 정황이 오히려 6선 고지를 밟아 국회의장의 꿈을 키우는 채찍이 됐는지 모른다.
지난해 10·28 양산 보궐선거를 통해 박희태라는 이름 석자를 다시 국회에 걸었다. 드디어 지난달 8일 국회 본회의에서 총 249표 중 236표를 획득, 득표율 95%로 18대 후반기 국회의장에 당선됐다. 1992년 제14대 국회 이후 최고 득표율이다.
박 의장은 자신의 인생에 점수를 매긴다면 몇 점이나 주겠냐는 질문에 “그거야 남들이 평가할 문제지. 정치권에 들어와서 법무장관, 여당 대표, 국회의장까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고 운명론에 공을 돌렸다.
그는 앞으로 고향을 위해 그동안 받은 사랑을 환원할 수 있는 일들을 구상 중이다. “아직 공개할 단계는 아니다”며 구체적 언급은 않았다.
박 의장은 저서 ‘대변인’ 말미에 고향 남해를 이렇게 그렸다.
“지금도 눈감으면 들려오는 파도소리,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모래와 자갈이 곱게 깔린 해변위를 맴돈다. 내 고향은 섬이다. 반도의 남녘자락 그 파란 물에 포근히 안겨 있는 남해 섬은 한 폭의 그림이다.”
노정객의 마음 한구석엔 언제나 머나먼 쪽빛 바다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이 있다. 그리움은 60년 전 해변을 내달리던 소년의 눈과 가슴이 되어 하루에도 몇 번씩 섬 허리를 휘감아 돈다.
이상권기자 sky@knnews.co.kr
검사 꿈꾸던 남해 섬소년, 대한민국 입법부 수장되다
-경남신문-
남해 물건리에서 미조항으로 가는/삼십리 물미해안/허리에 낭창낭창 감기는 바람을 밀어내며/길은 잘 익은 햇살 따라 부드럽게 휘어지고/섬들은 수평선 끝을 잡아/그대 처음 만난 날처럼 팽팽하게 당기는데(고두현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중에서)
소년은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바다는 오히려 슬픔으로 다가왔다. 파도처럼 그렇게 마음속 풍랑이 일었다 잔잔해지기를 반복했다.
검사를 꿈꾸던 소년에게 현실의 벽은 너무 높았다. 명문중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지만 가정형편이 여의치 않아 유학은 꿈도 못꿨다.
낙담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 소년이 60년 후 대한민국 입법부 수장이 됐다. 당시에는 자신도, 주변의 그 누구도 상상조차 못했던 그야말로 ‘꿈’이었다.
1938년 남해군 이동면에서 태어났다. 남해 출신 시인의 노래처럼 쪽빛 바다를 품은, 그림 같은 풍광을 간직한 곳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천혜의 자연에 견주기엔 삶은 너무 팍팍했다.
박 의장은 2남4녀 중 넷째다. 딸 셋 이후 낳은 그야말로 ‘귀한’ 아들이었다. 많은 사랑을 받은 때문인지 모친에 대한 아련함도 컸다.
“국회의원 3선 당선 이후에 아흔둘의 연세로 돌아가셨는데, 평소 드린 용돈을 모아 두셨다가 선거 때면 보태 쓰라고 손에 꼭 쥐어주셨다. 극구 사양하면 이걸 써야 성공한다고 우기셨는데….” 잠시 말문을 닫았다.
박 의장이 법조인의 길을 선택한 것은 어린 나이에 갑작스럽게 당한 부친의 별세가 계기였다. “객지에서 양복 기술을 배워 한평생 조그마한 양복점을 경영하며 가난과 싸우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라고 선친을 회고했다. 박 의장이 초등학교 4학년쯤 작고했다. “갑자기 변사사건이 발생했는데 검사 지휘하에 장례를 치를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검사라는 직업에 대해 알게 됐고 그 길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배경도 돈도 없는 내가 사회를 헤쳐나가려면 사법고시 합격 외에는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년은 중학교 진학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당시 명문 경남중 교복 소매와 모자에 장식된 두 줄의 흰선, 즉 ‘쌍백선(雙白線)’은 선망의 대상이었어. 그때는 국가시험을 쳤는데 경남중학교에 지원해 8등으로 합격했지. 그런데 문제는 1951년이라 6·25전쟁이 한창인데다 유학할 형편이 못돼 등록을 못한 거지.”
경남중 진학이 좌절된 채 한동안 쉬었다. 그런데 마침 “인재를 놀릴 수 없다”며 남해중학교에서 특별입학을 허가했다.
박 의장은 아직도 당시 중학교 국가시험 문제를 기억했다. 명석함이야 검증받았지만 어린 가슴에 남은 아쉬움이 너무 컸던 때문으로 짐작된다.
“시골에서 보낸 초·중학교 시절은 다 비슷하지. 공 차고 뛰어놀다가 해가 저물어야 집에 들어가고, 그야말로 ‘야생생활’이지.(웃음) 중학교 때는 왕복 40리를 걸어다녔는데 그때 기초체력이 다져진 것 같아.”
전쟁이 끝나고 경남고교로 진학했다. 10살 터울의 둘째 누이가 결혼해 부산에 신접살림을 차린 덕을 봤다. 300명 입학정원에 40등 정도 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고교 3년간 누님댁에서 생활했는데 매부는 당시 가난한 공무원으로 단칸방에서 같이 살았어. 지금 생각하면 미안하기 짝이 없지….”
고교시절 단연 수위권을 달렸다. “고 3때 모의시험을 봤는데 전교 4등한 적도 있고 항상 10등 이내에는 들었지. 영어 과목은 1등을 한 적도 있다”고 했다.
서울법대를 진학했지만 가난은 더욱 무겁게 그를 짓눌렀다. “서울에서 유학은 더 힘들었지. 항상 쪼들린 생활이었으니까. 서너달 하숙하다 돈이 떨어지면 고향으로 가 고시공부를 했어. 방학이 끝나고 등록할 즈음이면 목돈 마련을 위해 어머니께서 이곳저곳을 다니시며 돈 빌리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
박 의장은 서울법대를 졸업하던 23살 때 사법고시에 합격, 어린 시절 꿈꾸던 검사의 길을 걸었다.
검찰 사상 드물게 춘천·대전·부산 등 지검장을 3번이나 지냈다. 부산 고검장으로 ‘잘나가던’ 시절, 갑자기 정치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인재 많기로 소문난 사법고시 13기의 선두주자였던 만큼 주위의 놀라움도 컸다.
본인의 극구 사양에도 당시 민정당 사무총장이자 서울법대 선배였던 심명보 사무총장이 영입에 공을 들였다는 후문이다.
13대 국회 4·26총선이었다. 4월 1일 사표를 냈으니 20여 일간의 선거운동이 고작이었다. 그는 현역이던 통일민주당 문부식 의원에 1만여 표 차이로 승리를 거뒀다.
당시 선거는 야풍(野風)이 강했다.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의 바람이 경남과 부산을 휩쓸었다. 여당인 민정당 후보 중 경남지역은 절반 정도, 부산은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낙선했다.
얼떨결에 정치권에 발을 들였지만 이후 화려한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18대 국회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다. 물론 중간중간 우여곡절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국회에 입성한 지 6개월 만에 대변인으로 발탁됐다. 초선인데다 비언론인 출신이 여당 대변인을 맡은 것은 이례적이다. 원내부총무를 하면서 기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속칭 ‘기자실 공천’으로 발탁됐다는 후문이다.
순발력과 풍부한 어휘력으로 1988년부터 문민정부 출범 직후까지 4년3개월간 대변인 자리를 지켰다. 헌정 사상 최장수 대변인이다. 품격 있는 촌철살인의 논평은 아직도 회자된다. ‘총체적 난국’ ‘정치 9단’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 등 인구에 회자되는 많은 유행어를 만들어 명성을 날렸다.
박 의장은 딱 한 권의 저서가 있다. 주변의 요청이 많았으나 “경망스럽게 무슨 책을….” 이라며 오히려 면박을 줬다. 2006년 펴낸 한 권의 책 이름도 ‘대변인’이다. 그만큼 대변인에 대한 애착은 남다르다.
박 의장은 맛깔스럽고 탁월한 조어능력의 소유자다. 그는 “언어 순발력은 어머님의 영향을 많아 받았다. 비록 촌로(村老)였지만 순간적인 재치와 재미있는 말씀을 곧잘 하시는 분이셨다”고 회고했다.
대변인을 끝내고 정계 입문 5년 만에 법무부 장관에 발탁됐다. 국회법사위원장, 운영위원장, 원내총무, 한나라당 부총재, 최고위원, 대표최고위원, 국회 부의장 등을 거쳤다.
정치인생의 가장 큰 고비는 2008년 4월 18대 총선 낙천이었다.
박 의장은 지난 대선 경선 때 이명박 캠프 선대위원장을 맡으며 정권 창출의 핵심 역할을 했다. 이 대통령에게 정치적 조언을 했던 ‘6인 회의’ 멤버다. 그럼에도 공천에서 쓴잔을 마셨다.
“낙천에 대한 서운함이야 컸지만 말 한 마디 안했다. 언론의 요청에도 한 마디 안했다. 대통령 경선 선대위원장이었는데 공천 탈락을 생각이나 했겠나. 속으로 참자, 참자, 또 참자고 되뇌었다.”
그는 낙천의 충격에도 당의 요청을 받아들여 선대위원장을 맡아 분골쇄신했다. 인고의 시간을 보낸 덕분인지 3개월 만인 7월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선출돼 재기했다. 하지만 원외대표라는 한계를 들어 당내 ‘흔들기’는 계속됐다. 이런 정황이 오히려 6선 고지를 밟아 국회의장의 꿈을 키우는 채찍이 됐는지 모른다.
지난해 10·28 양산 보궐선거를 통해 박희태라는 이름 석자를 다시 국회에 걸었다. 드디어 지난달 8일 국회 본회의에서 총 249표 중 236표를 획득, 득표율 95%로 18대 후반기 국회의장에 당선됐다. 1992년 제14대 국회 이후 최고 득표율이다.
박 의장은 자신의 인생에 점수를 매긴다면 몇 점이나 주겠냐는 질문에 “그거야 남들이 평가할 문제지. 정치권에 들어와서 법무장관, 여당 대표, 국회의장까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고 운명론에 공을 돌렸다.
그는 앞으로 고향을 위해 그동안 받은 사랑을 환원할 수 있는 일들을 구상 중이다. “아직 공개할 단계는 아니다”며 구체적 언급은 않았다.
박 의장은 저서 ‘대변인’ 말미에 고향 남해를 이렇게 그렸다.
“지금도 눈감으면 들려오는 파도소리,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모래와 자갈이 곱게 깔린 해변위를 맴돈다. 내 고향은 섬이다. 반도의 남녘자락 그 파란 물에 포근히 안겨 있는 남해 섬은 한 폭의 그림이다.”
노정객의 마음 한구석엔 언제나 머나먼 쪽빛 바다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이 있다. 그리움은 60년 전 해변을 내달리던 소년의 눈과 가슴이 되어 하루에도 몇 번씩 섬 허리를 휘감아 돈다.
이상권기자 sky@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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