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정보
내용
나의 작품을 말한다 (17) 한국화가 하미혜
30년 화폭에 그린 ‘나비의 꿈’
-경남신문-
나비의 천국이다. 흰나비, 노랑나비, 호랑나비…. 무엇을 하려는지 훨훨 노닐고 있다. 호젓하다. 단아하다. 우아하다. 예쁘다. 펄펄거리는 날갯짓 하나하나에 무수한 언어를 쏟아내고 있다. 인간이 만들 수 있는 한계 이상의 색채를 뿜어내며 요염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인간이 닿을 수 없는 한계 이상의 저너머까지 날아 올라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그 생각 이상의 사유로 온갖 상념을 던져주고는 이내 그 상념을 자유롭게 떨칠 수 있는 비법을 수많은 언어와 아름다운 색채로 전달하고 있다.
진주에서 작업하고 있는 한국화가 하미혜(70) 화백의 화폭에는 수많은 나비들이 개개의 언어와 색채를 발산하면서 바라보는 이들을 “화폭으로 들어와 함께 날자”고 유혹한다. 유혹의 수준을 넘어 그의 그림을 바라보는 순간 이미 몸은 화폭으로 빨려들어가 나비와 함께 춤을 추게 된다. 나비의 색채와 언어는 몸보다는 정신을 이미 지배해버려 옆사람이 “툭” 치지 않으면 화폭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상황에 놓일 듯하다.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에 당도했지만 나이가 전해 주는 느슨해진 경륜보다 불혹(不惑·40세)의 중반쯤밖에 보이지 않는 외모에 약관(弱冠·20세)의 청년에서 볼 수 있는 정열로 창작에만 몰두해 있는 하미혜 화백을 만나기 위해 진주시 이현동과 대안동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을 노크했다.
하 화백은 진주여중 1학년 때 당시 김길수 미술선생님이 미술부 활동을 권유해 처음 붓을 잡았다. 진주여고에 진학해서도 미술부 활동을 했고, 국립부산사범대학 미술과를 졸업한 뒤 고등학교에서 1년 정도 교편을 잡다가 결혼 후 그만두고, 주부 겸 전업작가의 길을 선택했다.
여고 3학년 때 제9회 영남예술제에서 학생부 최고상인 문교부장관상을 받아 그림을 평생 그리는 계기를 가졌다.
하 화백이 ‘미혜’라는 이름을 갖게 된 데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도청 소재지가 진주였던 해방 이전에 도청 공무원을 했던 아버지 하해룡씨는 시를 지어 발표를 하는 등 문화예술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다. 어버지는 밀레의 그림도 좋아해 1941년 셋째딸을 안으면서 ‘밀레→미레→미혜’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름에서도 대가의 냄새를 풍기도록 한 것이다. 그런 아버지는 물감과 화구를 일본에서 주문해 조달하는 등 붓을 든 딸의 뒤를 밀어주었다.
하 화백은 “하지만 아버지는 딸이 전업작가가 되기보다 미술교사가 돼 시집을 잘 갔으면 했는데, 미술교사도 했고 남편도 잘 만나 아버지의 뜻을 이뤄드렸다”고 회상했다.
전업작가가 된 하 화백은 젊은 시절 진주에서 많을 일을 해냈다. 지난 1971년에는 최태문·박덕규 화백과 함께 진주일요그림회를 만들어 15명을 모았다. 서울에서는 보편화됐던 그림회를 진주에서 만들어 전시회를 하면서 미술 바람을 일으켰다. 1985년에는 25명이 참가하는 진주여류작가회를 만들어 초대회장을 맡아 이후 16년간 회장을 지내 왔다. 여류작가회는 팸플릿 대신 작품 캘린더를 만들어 관람객 가정에 연중 걸어두고 볼수 있도록 했는데, 지금도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하 화백이 처음부터 한국화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중·고교 때는 서양화를 배웠고, 사범대학 다닐 때는 동양화와 서양화를 모두 섭렵했는데, 대학시절 중고교시절 접해보지 못했던 한국화를 보면서 선이나 아름다운 먹의 번짐에 반해 한국화로 돌아서게 됐다.
하 화백은 “화선지의 번짐은 수채화보다 더 예민하지만 더 아름답게 선과 먹의 번짐을 만들수 있다. 우연의 효과도 있지만 한국화의 여백미와 여유로움이 좋아서 한국화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칠순을 맞은 하 화백은 가정과 작업실이라는 양면적 공간을 오가며 어느 곳 하나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고 술회한다. 가정이라는 태생적 목적을, 그림이라는 생활의 존재 이유를 남편 뒷바라지와 2남1녀의 자녀를 키우면서 모두 챙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요즘이 더 바쁘다. 생활의 안정도 찾았고, 자녀들이 모두 성년이 돼 자신만의 정체성을 보다 확실히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고, 그 정체성을 찾는 도구인 그림을 더 치열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 화백의 대표 소재는 ‘나비’이다. 하지만 그의 초기 작품은 조선 여인들의 장신구, 분청사기의 전통문양 등으로 화면을 구성했다. 그런 그가 조선 여인들의 장신구를 그리면서 그 속에 등장하는 나비를 처음 만난 것이다.
1980년 초 나비에 빠진 그는 장신구 등에 숨어 있는 박제된 나비보다 실제 살아있는 나비를 그려보겠다는 야심이 생겼고, 그렇게 나비를 주소재로 그린 것이 벌써 30년을 넘겼다. 보통 그림에서 나비는 남성을, 꽃은 여성으로 해석되며, 나비는 기쁨과 여름을 상징하고, 좋은 부부 금실을 뜻하기도 한다.
하 화백에게 적어도 나비는 색상과 무늬가 화려해 아름다움을 상징하며, 시작을 알리는 봄과 정열의 여름, 드높은 희망, 청정한 순수 등으로 인한 추억의 대상으로 규정짓고 작업하는 듯하다.
하 화백은 기본적인 모티프를 나비로 삼고 있지만 나비를 쉽게 연상되는 미적 아름다움의 대상만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그 표현적 특징에 있어 마치 화석처럼 정지된 표정의 나비 모습이 이를 잘 대변한다.
특별히 주목할 것은 그에게는 조형적인 호접도나 백접도 같은 유형 없이 공간의 구성과 균형이 구상화풍으로 처리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표현은 오히려 나비가 새로운 창조를 뜻하며 변신의 상징으로서 새로운 삶을 표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최근에는 30여 년간 애지중지 키워온 나비를 갈기갈기 뜯어내고 있다. 날개는 날개대로, 더듬이는 더듬이대로, 다리도, 눈도, 날개 속의 문양도 마구 해체하고 있다.
한국화의 모든 기법이 나비 속에 숨어 있다고 믿는 그는 최근작에서 보여주는 나비 형상의 트리밍 작업을 통해 온전한 나비 형상보다 그 나비가 품고 있는 아름다운 선과 문양을 트리밍으로 확대해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의 작업을 언뜻 보면 지극히 비구상적 화풍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자세히 보면 철저히 구상적 화풍을 견지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 수 있다.
그는 나비 트리밍 작업을 통해 놀라운 경험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름다운 색과 미려한 선, 기하학적 문양이 트리밍을 통해 확대되면서 그 트리밍 속을 자세히 보면 샤갈과 마티스, 피카소 등 학창시절 열광했던 대가들의 작품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당대의 대가들이 풀고자 했던 창작 아이템을 어쩌면 수천년을 살아온 나비의 특정 문양에서 찾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30여년 전 나비를 처음 그렸고, 나비의 이미징 작업을 거쳐 해체를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지난달 서울 인사아트센터 전관과 진주 경남도문화예술회관에서 동시에 열린 전시회에 ‘선을 이용한 나비의 엉김 작업’을 발표했는데, 관람객들이 “한번도 보지 못했던 작품”이라며 극찬하기도 했다.
그의 그림은 색깔이 화려한 그림이 많은데 항상 먹으로 시작해서 먹으로 끝낸다. 화려한 색 밑에는 항상 먹이 들어 있다. 색깔은 분채로 나타낸다. 나비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색의 석분채를 구입하거나 중국·일본 등 외국 그룹전 참가 때 현지에서 구입해 쓴다.
한지는 10년 전부터 요철한지를 사용하는데, 선과 색깔이 보통 화선지보다 나타내기 어려운 측면이 있으나 작품을 해놓고 보면 한국화의 가벼움과 단조로움이 없고 작품의 깊이가 더 있기 때문에 사용한다. 마지막에 배면작업을 하는데 그냥 화선지는 스며나오는 속도가 빨라 색깔이 번져 나오는 경계가 날카로운데 반해 요철한지는 두꺼워 스며나오는 시간이 하룻밤은 지나야 되기 때문에 무궁무진한 깊이를 전달한다.
‘작가는 그림으로 말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는 하 화백은 후배 작가들이 많이 생각하고, 많이 그리는 등 열심히 창작한다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조언한다.
그는 화단의 원로로서 작품이 좋아야 부끄럽지 않다는 생각에서 최근 의욕적으로 작업하고 있는 나비문양 트리밍 신작을 2년 정도 준비해 미국에서 전시회를 할 생각이다. 초대는 이미 받아 놓았고 신작 20여 점을 걸 생각이다.
나비의 자유를 탐구하며, 나비가 좋아 30여 년간 화폭에 담고 있는 여류 화백. 나비 같은 미소에 그 순수를 지향하는 하 화백의 정신과 육체에서 나비의 무한한 비상과 이상을 엿볼 수 있다.
☞ 하미혜 화백은= 1941년 진주에서 출생. 국립 부산사범대학 미술과를 졸업하고 일본 기다미시초대전, 한독문화교류전, 화랑미술제, 여수국제아트페스티벌 등 200여 회의 단체전과 9회의 개인전을 갖는 등 왕성한 기량을 발휘했다. 경남미술대전 연4회 특선과 동양화부문 대상(제2회·1979년), 특별상 유당상(2006년), 경남미술대전 초대작가상, 월간 미술세계 자랑스러운 미술인상을 수상했다. 대한민국미술대전 등 유수의 공모전에 심사와 운영위원으로 참여했으며, 한국미협 제21대 부이사장, 경남도립미술관 운영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한국미협 제22대 부이사장, 진주미협 고문, 진주여류작가회 고문으로 있다. 홈페이지: www.hamihye.com
글·사진= 조윤제기자 cho@knnews.co.kr
30년 화폭에 그린 ‘나비의 꿈’
-경남신문-
나비의 천국이다. 흰나비, 노랑나비, 호랑나비…. 무엇을 하려는지 훨훨 노닐고 있다. 호젓하다. 단아하다. 우아하다. 예쁘다. 펄펄거리는 날갯짓 하나하나에 무수한 언어를 쏟아내고 있다. 인간이 만들 수 있는 한계 이상의 색채를 뿜어내며 요염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인간이 닿을 수 없는 한계 이상의 저너머까지 날아 올라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그 생각 이상의 사유로 온갖 상념을 던져주고는 이내 그 상념을 자유롭게 떨칠 수 있는 비법을 수많은 언어와 아름다운 색채로 전달하고 있다.
진주에서 작업하고 있는 한국화가 하미혜(70) 화백의 화폭에는 수많은 나비들이 개개의 언어와 색채를 발산하면서 바라보는 이들을 “화폭으로 들어와 함께 날자”고 유혹한다. 유혹의 수준을 넘어 그의 그림을 바라보는 순간 이미 몸은 화폭으로 빨려들어가 나비와 함께 춤을 추게 된다. 나비의 색채와 언어는 몸보다는 정신을 이미 지배해버려 옆사람이 “툭” 치지 않으면 화폭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상황에 놓일 듯하다.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에 당도했지만 나이가 전해 주는 느슨해진 경륜보다 불혹(不惑·40세)의 중반쯤밖에 보이지 않는 외모에 약관(弱冠·20세)의 청년에서 볼 수 있는 정열로 창작에만 몰두해 있는 하미혜 화백을 만나기 위해 진주시 이현동과 대안동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을 노크했다.
하 화백은 진주여중 1학년 때 당시 김길수 미술선생님이 미술부 활동을 권유해 처음 붓을 잡았다. 진주여고에 진학해서도 미술부 활동을 했고, 국립부산사범대학 미술과를 졸업한 뒤 고등학교에서 1년 정도 교편을 잡다가 결혼 후 그만두고, 주부 겸 전업작가의 길을 선택했다.
여고 3학년 때 제9회 영남예술제에서 학생부 최고상인 문교부장관상을 받아 그림을 평생 그리는 계기를 가졌다.
하 화백이 ‘미혜’라는 이름을 갖게 된 데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도청 소재지가 진주였던 해방 이전에 도청 공무원을 했던 아버지 하해룡씨는 시를 지어 발표를 하는 등 문화예술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다. 어버지는 밀레의 그림도 좋아해 1941년 셋째딸을 안으면서 ‘밀레→미레→미혜’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름에서도 대가의 냄새를 풍기도록 한 것이다. 그런 아버지는 물감과 화구를 일본에서 주문해 조달하는 등 붓을 든 딸의 뒤를 밀어주었다.
하 화백은 “하지만 아버지는 딸이 전업작가가 되기보다 미술교사가 돼 시집을 잘 갔으면 했는데, 미술교사도 했고 남편도 잘 만나 아버지의 뜻을 이뤄드렸다”고 회상했다.
전업작가가 된 하 화백은 젊은 시절 진주에서 많을 일을 해냈다. 지난 1971년에는 최태문·박덕규 화백과 함께 진주일요그림회를 만들어 15명을 모았다. 서울에서는 보편화됐던 그림회를 진주에서 만들어 전시회를 하면서 미술 바람을 일으켰다. 1985년에는 25명이 참가하는 진주여류작가회를 만들어 초대회장을 맡아 이후 16년간 회장을 지내 왔다. 여류작가회는 팸플릿 대신 작품 캘린더를 만들어 관람객 가정에 연중 걸어두고 볼수 있도록 했는데, 지금도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하 화백이 처음부터 한국화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중·고교 때는 서양화를 배웠고, 사범대학 다닐 때는 동양화와 서양화를 모두 섭렵했는데, 대학시절 중고교시절 접해보지 못했던 한국화를 보면서 선이나 아름다운 먹의 번짐에 반해 한국화로 돌아서게 됐다.
하 화백은 “화선지의 번짐은 수채화보다 더 예민하지만 더 아름답게 선과 먹의 번짐을 만들수 있다. 우연의 효과도 있지만 한국화의 여백미와 여유로움이 좋아서 한국화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칠순을 맞은 하 화백은 가정과 작업실이라는 양면적 공간을 오가며 어느 곳 하나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고 술회한다. 가정이라는 태생적 목적을, 그림이라는 생활의 존재 이유를 남편 뒷바라지와 2남1녀의 자녀를 키우면서 모두 챙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요즘이 더 바쁘다. 생활의 안정도 찾았고, 자녀들이 모두 성년이 돼 자신만의 정체성을 보다 확실히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고, 그 정체성을 찾는 도구인 그림을 더 치열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 화백의 대표 소재는 ‘나비’이다. 하지만 그의 초기 작품은 조선 여인들의 장신구, 분청사기의 전통문양 등으로 화면을 구성했다. 그런 그가 조선 여인들의 장신구를 그리면서 그 속에 등장하는 나비를 처음 만난 것이다.
1980년 초 나비에 빠진 그는 장신구 등에 숨어 있는 박제된 나비보다 실제 살아있는 나비를 그려보겠다는 야심이 생겼고, 그렇게 나비를 주소재로 그린 것이 벌써 30년을 넘겼다. 보통 그림에서 나비는 남성을, 꽃은 여성으로 해석되며, 나비는 기쁨과 여름을 상징하고, 좋은 부부 금실을 뜻하기도 한다.
하 화백에게 적어도 나비는 색상과 무늬가 화려해 아름다움을 상징하며, 시작을 알리는 봄과 정열의 여름, 드높은 희망, 청정한 순수 등으로 인한 추억의 대상으로 규정짓고 작업하는 듯하다.
하 화백은 기본적인 모티프를 나비로 삼고 있지만 나비를 쉽게 연상되는 미적 아름다움의 대상만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그 표현적 특징에 있어 마치 화석처럼 정지된 표정의 나비 모습이 이를 잘 대변한다.
특별히 주목할 것은 그에게는 조형적인 호접도나 백접도 같은 유형 없이 공간의 구성과 균형이 구상화풍으로 처리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표현은 오히려 나비가 새로운 창조를 뜻하며 변신의 상징으로서 새로운 삶을 표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최근에는 30여 년간 애지중지 키워온 나비를 갈기갈기 뜯어내고 있다. 날개는 날개대로, 더듬이는 더듬이대로, 다리도, 눈도, 날개 속의 문양도 마구 해체하고 있다.
한국화의 모든 기법이 나비 속에 숨어 있다고 믿는 그는 최근작에서 보여주는 나비 형상의 트리밍 작업을 통해 온전한 나비 형상보다 그 나비가 품고 있는 아름다운 선과 문양을 트리밍으로 확대해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의 작업을 언뜻 보면 지극히 비구상적 화풍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자세히 보면 철저히 구상적 화풍을 견지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 수 있다.
그는 나비 트리밍 작업을 통해 놀라운 경험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름다운 색과 미려한 선, 기하학적 문양이 트리밍을 통해 확대되면서 그 트리밍 속을 자세히 보면 샤갈과 마티스, 피카소 등 학창시절 열광했던 대가들의 작품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당대의 대가들이 풀고자 했던 창작 아이템을 어쩌면 수천년을 살아온 나비의 특정 문양에서 찾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30여년 전 나비를 처음 그렸고, 나비의 이미징 작업을 거쳐 해체를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지난달 서울 인사아트센터 전관과 진주 경남도문화예술회관에서 동시에 열린 전시회에 ‘선을 이용한 나비의 엉김 작업’을 발표했는데, 관람객들이 “한번도 보지 못했던 작품”이라며 극찬하기도 했다.
그의 그림은 색깔이 화려한 그림이 많은데 항상 먹으로 시작해서 먹으로 끝낸다. 화려한 색 밑에는 항상 먹이 들어 있다. 색깔은 분채로 나타낸다. 나비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색의 석분채를 구입하거나 중국·일본 등 외국 그룹전 참가 때 현지에서 구입해 쓴다.
한지는 10년 전부터 요철한지를 사용하는데, 선과 색깔이 보통 화선지보다 나타내기 어려운 측면이 있으나 작품을 해놓고 보면 한국화의 가벼움과 단조로움이 없고 작품의 깊이가 더 있기 때문에 사용한다. 마지막에 배면작업을 하는데 그냥 화선지는 스며나오는 속도가 빨라 색깔이 번져 나오는 경계가 날카로운데 반해 요철한지는 두꺼워 스며나오는 시간이 하룻밤은 지나야 되기 때문에 무궁무진한 깊이를 전달한다.
‘작가는 그림으로 말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는 하 화백은 후배 작가들이 많이 생각하고, 많이 그리는 등 열심히 창작한다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조언한다.
그는 화단의 원로로서 작품이 좋아야 부끄럽지 않다는 생각에서 최근 의욕적으로 작업하고 있는 나비문양 트리밍 신작을 2년 정도 준비해 미국에서 전시회를 할 생각이다. 초대는 이미 받아 놓았고 신작 20여 점을 걸 생각이다.
나비의 자유를 탐구하며, 나비가 좋아 30여 년간 화폭에 담고 있는 여류 화백. 나비 같은 미소에 그 순수를 지향하는 하 화백의 정신과 육체에서 나비의 무한한 비상과 이상을 엿볼 수 있다.
☞ 하미혜 화백은= 1941년 진주에서 출생. 국립 부산사범대학 미술과를 졸업하고 일본 기다미시초대전, 한독문화교류전, 화랑미술제, 여수국제아트페스티벌 등 200여 회의 단체전과 9회의 개인전을 갖는 등 왕성한 기량을 발휘했다. 경남미술대전 연4회 특선과 동양화부문 대상(제2회·1979년), 특별상 유당상(2006년), 경남미술대전 초대작가상, 월간 미술세계 자랑스러운 미술인상을 수상했다. 대한민국미술대전 등 유수의 공모전에 심사와 운영위원으로 참여했으며, 한국미협 제21대 부이사장, 경남도립미술관 운영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한국미협 제22대 부이사장, 진주미협 고문, 진주여류작가회 고문으로 있다. 홈페이지: www.hamihye.com
글·사진= 조윤제기자 cho@knnews.co.kr
0
0
게시물수정
게시물 수정을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댓글삭제게시물삭제
게시물 삭제를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