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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향기> 극지탐험가 이근배씨
<경남신문>
세상의 꼭짓점 찾아 늘 가슴 두근거리는 도전
극지탐험가 이근배씨가 창원시 마산합포구 석전2동 용마항공여행사 사무실에서, 썰매를 끌며 북극점을 향하고 있는 자신의 대형 사진을 가리키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지난 1995년 3월 어느 날 새벽 4시, 백야의 북극해에 또 하루가 시작됐다. 눈과 얼음뿐인 바다 한가운데에 서 있는 텐트에 램프 불빛이 비친다. 오리털 침낭 속에서 밤을 보낸 30대 중반의 한국인이 두터운 방한복을 껴입고 텐트 밖으로 몸을 내민다. 순간 코가 깨질 듯한 북극의 얼음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같은 텐트 속에서 단잠을 잔 동료 4명도 뒤이어 하나둘 밖으로 나온다.
이 시기 아침 북극 온도는 영하 45도가량, 여기에 시속 25㎞의 강풍이 쉴 새 없이 몰아치니 체감온도는 영하 80도 아래로 떨어진다. 용변 보는 것도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대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휘발유 버너에 불을 붙이고, 눈을 퍼담은 코펠을 불 위에 올리며 아침 준비를 한다. 그러나 눈을 녹여 물을 끓이기는 쉽지 않다. 북극의 혹한이 버너의 열을 대부분 뺏어버리기 때문이다.
건조 쌀밥인 알파미에 고춧가루, 그리고 동결건조한 쇠고기를 얹은 뒤 뜨거운 물을 붓고 또 한참을 기다린다. 고국의 아내가 지어준 밥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지만, 그런대로 요기를 할 수 있는 따뜻한 밥이 마련된다. 남은 물은 두 개의 보온병에 담는다. 하나는 점심끼니용 알파미에 쓸 것이고, 또 하나는 차를 마시기 위한 것이다.
오전 7시, 모든 출발 준비가 끝났다. 옷을 갖춰 입는 데만 30분이 걸렸다. 여기에다 물을 끓이고, 장비를 챙기고, 텐트를 걷고 나니 3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이제 GPS를 켜 위치를 확인하고, 또 풍향을 확인한 뒤 나아갈 방향을 잡는다. 오늘 걸을 구간은 20㎞ 남짓. 극한의 북극해에서 200㎏에 이르는 썰매를 끌고 이보다 더 나아가기도 힘들지만, 상황이 나쁘다고 하여 애초에 계획한 거리보다 덜 갈 수도 없는 처지다. 조금이라도 무게를 줄이기 위해 식량을 100일치만 가져왔기 때문이다.
선두를 200m가량 먼저 보낸 뒤 제2, 제3대원이 꼬리를 잇는다. 출발 2시간 뒤 처음으로 모든 대원이 모여 뜨거운 차로 몸을 데운다. 때로는 얼음물에 빠지는 위험천만한 상황도 일어나지만, 그 무엇도 이들의 도전을 가로막지 못했다.
그해 그달 12일 러시아 콤소몰레르섬 아크티췌스카 곶(북위 81도16분, 동경 95도44분50초)을 출발한 북극해 횡단 한국원정대는 븍극점을 거쳐 97일 5시간여 만에 캐나다 최북단 엘즈미어섬 워드헌터 곶(북위 83도06분, 서경 74도30분)에 도착했다. 무려 1800㎞에 이르는 대장정이었다.
북극해 원정대는 초기엔 난빙대에 막혀 하루 내내 1㎞를 전진하는 데 그치는 등 고전하기도 했으나, 하루 12시간의 강행군을 거듭한 끝에 예정일을 단축하며 횡단에 성공했다.
지난 88년 캐나다-러시아 합동원정대에 이어 사상 2번째, 단일국가로는 세계 최초로 북극해 도보횡단에 성공한 한국 원정대는 허영호 대장을 비롯해 장기찬, 김범택, 김승환, 그리고 경남 출신의 이근배(49·창원시 성산구 신촌동·용마항공여행사 대표)씨 등 5명으로 이뤄졌다.
“한번은 북극곰이 우리 텐트 옆에 바짝 다가온 거예요. 무척 굶주린 놈인 것 같았어요. 이 같은 상황에 대비해 총을 갖고 오긴 했지만, 썰매에 뒀지 뭡니까. 곰과의 거리는 10걸음 정도, 그 사이에 썰매가 있었어요. 제가 텐트 밖으로 나갔죠. 곰과 1대1로 마주친 거죠. 눈앞이 하얘지더라구요.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 총을 집었습니다.”
상기된 표정의 이씨는 “휴”하며 길게 심호흡을 했다.
북극을 횡단한 이씨는 이듬해 11월부터 역시 허영호 대장과 함께 남극탐험에 들어가 도보로 직선거리 1400㎞를 걸어 67일 만에 남극점을 밟았다.
북극과 남극, 두 극지를 탐험한 이씨는 경남도가 지난 2008년 발간한 ‘경남새마루’에 경남 최초의 극지탐험가로 기록됐다.
이씨의 극지 탐험은 이미 1989년에 시작됐다. 진해에서 태어나 1980년 창원남고에 진학한 그는 2학년 겨울방학 때 솜이불을 배낭에 매달고 지리산에 올랐다. 그곳에서 전문 산악인들의 등반 모습을 목격하는 순간, 그에게 “필이 꽂혔다”고 했다. 3학년이 되면서 마산YMCA 등산클럽에도 가입했다. 당시 클럽에 같이 들어간 친구들은 현재까지 마산산악동지회에서 같이 활동하고 있다. 그는 북극점에서 마산산악동지회의 깃발을 펼쳐보이며 기념촬영을 했을 정도다.
창원전문대 관광과에 입학한 그는 산악부에 들어가 전문등반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원정 준비를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회가 왔습니다. 마산에서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꾸려졌습니다. 89년 가을이었죠.”
김인태 대장을 비롯한 16명의 마산 에베레스트 원정대는 국내 네 번째, 지역단위로는 최초로 지구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다. 허영호 대장과의 인연도 에베레스트에서 비롯됐다. 그는 로체 등반에 나섰던 허 대장 일행과 베이스캠프에서 한 달가량 함께 지내면서 우정을 다졌다.
이후 많을 경우 1년에 네 번씩 해외원정에 나선 그는 K2와 안나푸르나 등 히말라야 산군을 포함해 알레스카 맥킨리,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 러시아 엘브르즈 등 각 대륙의 최고봉을 연이어 올랐다.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에베레스트 동벽을 셰르파 없이 등반했고, 특히 유럽 최고봉인 엘브르즈에는 딸 다래(당시 14살)와 함께 올랐다.
지구의 3개 극지인 에베레스트와 남·북극은 물론, 각 대륙의 최고봉 등 꼭짓점을 찾아 다니는 그는 “탐험의 기본은 등반”이라면서도 “‘서로 다른 맛’ 때문에 극지 탐험을 계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태까지 120여 개국 1000여 개 도시를 다닌 그이지만 “아직 안 가본 곳이 훨씬 더 많아서, 좀 다녔다고 할 수도 없다”고 했다.
지난 1987년 결혼한 뒤 주말산행 가이드를 하며 생계를 꾸려갔던 그는 2004년 ‘용마관광’을 인수, 용마항공여행사로 이름을 바꾸고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극지 탐험으로 ‘98 올해의 경남인상’ 등을 받으면서 유명인사가 됐지만, 술자리를 마치고 집에 돌아갈 때는 택시비가 없을 정도로 경제적인 현실은 냉혹했다.
“경제적인 벽을 뛰어넘어야 산악인으로서 자기완성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죠. 여행사를 시작한 이후에는 후원 없이 다니는 것이 가능해졌고, 또 우리 지역 산악인들이 원정등반하는 데 조금의 도움도 줄 수 있게 됐습니다. 등반 경비를 스스로 마련하지 못했던 시절에 받아왔던 후원을 사회에 환원한다고 할 수도 있겠죠.”
말술로도 통했던 그는 10년 전 술을 끊었다. 술을 마시다 보면, 산에 오르다 다치거나 불귀의 객이 된 친구들이 떠올라 고통스럽기 때문이라고 한다.
“산악인들에게 죽음은 바로 코앞에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 가더라도 깨끗이 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외상을 달지 않습니다”라는 그의 말에 비장함이 묻어난다.
“산에 오르는 행위는 인간 한계에 대한 도전이어서, 산을 생각하면 늘 가슴이 두근거린다”는 그는 “죽음의 코앞에서 돌아오는 느낌, 그것이 좋아 등반을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내년 겨울에는 사학자인 친구와 함께 한 달 일정으로 바이칼 호수를 도보로 종단하는 또 다른 탐험을 시작한다. 남북 길이 636km에 이르는 바이칼을 종단하며 한민족의 뿌리를 찾아나서는 길이라고 한다.
생뚱맞게도, 여행사를 경영하며 돈을 버는 것과 등반하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울까 궁금해졌다.
“돈 버는 일이 등반하는 것보다는 쉬운 것 같아요. 목표치를 낮게 잡은 탓도 있겠지만,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경남신문>
세상의 꼭짓점 찾아 늘 가슴 두근거리는 도전
극지탐험가 이근배씨가 창원시 마산합포구 석전2동 용마항공여행사 사무실에서, 썰매를 끌며 북극점을 향하고 있는 자신의 대형 사진을 가리키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지난 1995년 3월 어느 날 새벽 4시, 백야의 북극해에 또 하루가 시작됐다. 눈과 얼음뿐인 바다 한가운데에 서 있는 텐트에 램프 불빛이 비친다. 오리털 침낭 속에서 밤을 보낸 30대 중반의 한국인이 두터운 방한복을 껴입고 텐트 밖으로 몸을 내민다. 순간 코가 깨질 듯한 북극의 얼음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같은 텐트 속에서 단잠을 잔 동료 4명도 뒤이어 하나둘 밖으로 나온다.
이 시기 아침 북극 온도는 영하 45도가량, 여기에 시속 25㎞의 강풍이 쉴 새 없이 몰아치니 체감온도는 영하 80도 아래로 떨어진다. 용변 보는 것도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대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휘발유 버너에 불을 붙이고, 눈을 퍼담은 코펠을 불 위에 올리며 아침 준비를 한다. 그러나 눈을 녹여 물을 끓이기는 쉽지 않다. 북극의 혹한이 버너의 열을 대부분 뺏어버리기 때문이다.
건조 쌀밥인 알파미에 고춧가루, 그리고 동결건조한 쇠고기를 얹은 뒤 뜨거운 물을 붓고 또 한참을 기다린다. 고국의 아내가 지어준 밥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지만, 그런대로 요기를 할 수 있는 따뜻한 밥이 마련된다. 남은 물은 두 개의 보온병에 담는다. 하나는 점심끼니용 알파미에 쓸 것이고, 또 하나는 차를 마시기 위한 것이다.
오전 7시, 모든 출발 준비가 끝났다. 옷을 갖춰 입는 데만 30분이 걸렸다. 여기에다 물을 끓이고, 장비를 챙기고, 텐트를 걷고 나니 3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이제 GPS를 켜 위치를 확인하고, 또 풍향을 확인한 뒤 나아갈 방향을 잡는다. 오늘 걸을 구간은 20㎞ 남짓. 극한의 북극해에서 200㎏에 이르는 썰매를 끌고 이보다 더 나아가기도 힘들지만, 상황이 나쁘다고 하여 애초에 계획한 거리보다 덜 갈 수도 없는 처지다. 조금이라도 무게를 줄이기 위해 식량을 100일치만 가져왔기 때문이다.
선두를 200m가량 먼저 보낸 뒤 제2, 제3대원이 꼬리를 잇는다. 출발 2시간 뒤 처음으로 모든 대원이 모여 뜨거운 차로 몸을 데운다. 때로는 얼음물에 빠지는 위험천만한 상황도 일어나지만, 그 무엇도 이들의 도전을 가로막지 못했다.
그해 그달 12일 러시아 콤소몰레르섬 아크티췌스카 곶(북위 81도16분, 동경 95도44분50초)을 출발한 북극해 횡단 한국원정대는 븍극점을 거쳐 97일 5시간여 만에 캐나다 최북단 엘즈미어섬 워드헌터 곶(북위 83도06분, 서경 74도30분)에 도착했다. 무려 1800㎞에 이르는 대장정이었다.
북극해 원정대는 초기엔 난빙대에 막혀 하루 내내 1㎞를 전진하는 데 그치는 등 고전하기도 했으나, 하루 12시간의 강행군을 거듭한 끝에 예정일을 단축하며 횡단에 성공했다.
지난 88년 캐나다-러시아 합동원정대에 이어 사상 2번째, 단일국가로는 세계 최초로 북극해 도보횡단에 성공한 한국 원정대는 허영호 대장을 비롯해 장기찬, 김범택, 김승환, 그리고 경남 출신의 이근배(49·창원시 성산구 신촌동·용마항공여행사 대표)씨 등 5명으로 이뤄졌다.
“한번은 북극곰이 우리 텐트 옆에 바짝 다가온 거예요. 무척 굶주린 놈인 것 같았어요. 이 같은 상황에 대비해 총을 갖고 오긴 했지만, 썰매에 뒀지 뭡니까. 곰과의 거리는 10걸음 정도, 그 사이에 썰매가 있었어요. 제가 텐트 밖으로 나갔죠. 곰과 1대1로 마주친 거죠. 눈앞이 하얘지더라구요.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 총을 집었습니다.”
상기된 표정의 이씨는 “휴”하며 길게 심호흡을 했다.
북극을 횡단한 이씨는 이듬해 11월부터 역시 허영호 대장과 함께 남극탐험에 들어가 도보로 직선거리 1400㎞를 걸어 67일 만에 남극점을 밟았다.
북극과 남극, 두 극지를 탐험한 이씨는 경남도가 지난 2008년 발간한 ‘경남새마루’에 경남 최초의 극지탐험가로 기록됐다.
이씨의 극지 탐험은 이미 1989년에 시작됐다. 진해에서 태어나 1980년 창원남고에 진학한 그는 2학년 겨울방학 때 솜이불을 배낭에 매달고 지리산에 올랐다. 그곳에서 전문 산악인들의 등반 모습을 목격하는 순간, 그에게 “필이 꽂혔다”고 했다. 3학년이 되면서 마산YMCA 등산클럽에도 가입했다. 당시 클럽에 같이 들어간 친구들은 현재까지 마산산악동지회에서 같이 활동하고 있다. 그는 북극점에서 마산산악동지회의 깃발을 펼쳐보이며 기념촬영을 했을 정도다.
창원전문대 관광과에 입학한 그는 산악부에 들어가 전문등반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원정 준비를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회가 왔습니다. 마산에서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꾸려졌습니다. 89년 가을이었죠.”
김인태 대장을 비롯한 16명의 마산 에베레스트 원정대는 국내 네 번째, 지역단위로는 최초로 지구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다. 허영호 대장과의 인연도 에베레스트에서 비롯됐다. 그는 로체 등반에 나섰던 허 대장 일행과 베이스캠프에서 한 달가량 함께 지내면서 우정을 다졌다.
이후 많을 경우 1년에 네 번씩 해외원정에 나선 그는 K2와 안나푸르나 등 히말라야 산군을 포함해 알레스카 맥킨리,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 러시아 엘브르즈 등 각 대륙의 최고봉을 연이어 올랐다.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에베레스트 동벽을 셰르파 없이 등반했고, 특히 유럽 최고봉인 엘브르즈에는 딸 다래(당시 14살)와 함께 올랐다.
지구의 3개 극지인 에베레스트와 남·북극은 물론, 각 대륙의 최고봉 등 꼭짓점을 찾아 다니는 그는 “탐험의 기본은 등반”이라면서도 “‘서로 다른 맛’ 때문에 극지 탐험을 계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태까지 120여 개국 1000여 개 도시를 다닌 그이지만 “아직 안 가본 곳이 훨씬 더 많아서, 좀 다녔다고 할 수도 없다”고 했다.
지난 1987년 결혼한 뒤 주말산행 가이드를 하며 생계를 꾸려갔던 그는 2004년 ‘용마관광’을 인수, 용마항공여행사로 이름을 바꾸고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극지 탐험으로 ‘98 올해의 경남인상’ 등을 받으면서 유명인사가 됐지만, 술자리를 마치고 집에 돌아갈 때는 택시비가 없을 정도로 경제적인 현실은 냉혹했다.
“경제적인 벽을 뛰어넘어야 산악인으로서 자기완성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죠. 여행사를 시작한 이후에는 후원 없이 다니는 것이 가능해졌고, 또 우리 지역 산악인들이 원정등반하는 데 조금의 도움도 줄 수 있게 됐습니다. 등반 경비를 스스로 마련하지 못했던 시절에 받아왔던 후원을 사회에 환원한다고 할 수도 있겠죠.”
말술로도 통했던 그는 10년 전 술을 끊었다. 술을 마시다 보면, 산에 오르다 다치거나 불귀의 객이 된 친구들이 떠올라 고통스럽기 때문이라고 한다.
“산악인들에게 죽음은 바로 코앞에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 가더라도 깨끗이 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외상을 달지 않습니다”라는 그의 말에 비장함이 묻어난다.
“산에 오르는 행위는 인간 한계에 대한 도전이어서, 산을 생각하면 늘 가슴이 두근거린다”는 그는 “죽음의 코앞에서 돌아오는 느낌, 그것이 좋아 등반을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내년 겨울에는 사학자인 친구와 함께 한 달 일정으로 바이칼 호수를 도보로 종단하는 또 다른 탐험을 시작한다. 남북 길이 636km에 이르는 바이칼을 종단하며 한민족의 뿌리를 찾아나서는 길이라고 한다.
생뚱맞게도, 여행사를 경영하며 돈을 버는 것과 등반하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울까 궁금해졌다.
“돈 버는 일이 등반하는 것보다는 쉬운 것 같아요. 목표치를 낮게 잡은 탓도 있겠지만,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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