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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것은 내 것이 아니라 사회의 것이다"

작성자
김철수
작성일
2010.12.12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1414
내용

[사람in] 개관 10년 맞은 삼진미술관 성임대 관장

 

"이것은 내 것이 아니라 사회의 것이다"  
 

 

개관 10년이란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난 성임대 삼진미술관장과 자리를 마주했다. 예상치 못한 복병이란 다름 아니라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있는 삼진미술관을 5년만 운영하고 정상궤도로 올려놓고 나서 다른 기관에 기증한 뒤 다른 일을 하리라 다짐했던 지난날 자신과의 약속 때문이다.

지난날이란 도대체 뭘까. 그의 정체가 궁금하다. 지역사람도 아니고 미술인도 아닌 성 관장이 옛 마산지역에 뿌리를 박고 살면서 밑도 끝도 없는 봉사를 시작한 이유의 실마리가 필요했다.

"과거를 묻지 마세요." 그는 옛이야기 하는 것을 꺼렸다. 평생을 반듯하게 살아온 삶의 경력 한가운데에 빨간 줄이 그인 적이 있었던 걸까. 항상 아쉽고 못내 이겨낸 지난날은 통째로 드러나지 않고 군데군데에서 엿들을 수 있었다.

 

 

농기계상·건설업 등 사업가로 살다

'조선 문장가 김택영 선생' 글귀 감동

 

그가 출퇴근하며 다닌 직장으론 미국 원조단체가 지어 기증한 문경시멘트공장(쌍용양회 전신)이 유일하다. 이후 농기계상회, 토목건설업, 슈퍼마켓, 빵공장, 고시원 등을 운영하는 사업가로 평생을 살았다. 1962년에는 덕유산을 개간해 뽕나무를 심어 상전을 이루기도 했다. 그가 잘나가던 많은 사업을 그만둔 이유는 불분명하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항상 사업은 5년 정도만 하고 밥 먹을 정도 되면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것을 평생 업으로 삼았다. 기둥뿌리를 튼실하게 키우면 관리하기 쉬운 상태가 된다. 그럼 또 다른 도전에 나선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내 삶의 방식이다.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사회의 것이다'라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의 인생 말미에 미술관이 자리 잡았다. "미술관 자리를 찾아 경남지역 폐교 35곳을 돌아다니고 있을 때 유일하게 창문과 유리가 박살 안 난 학교가 여기 상북초등학교 폐교였다. 그래서 이곳 정서가 제일 좋다고 생각했다."

미술관도 5년간 운영해 정상으로 만들어 놓고 시에 기증하려고 했다. 근데 문제가 생겼다.

폐교를 빌려 지난 10년간 십 수 억 원의 돈을 투입해 구조 변경하고 전시 기획하고 운동장과 정원을 가꾸어 놓았지만 시에서는 인수절차를 늦추고 있다. 그도 이제 경제적으로 한계상황이지만 그렇다고 미술관을 놓아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는 "처음에는 내 생애 최고의 실패작이 미술관이라고 생각했다. 5년째까지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미술관이 있으니 찾아오는 사람이라도 있으니 후회 없다"고 말한다.

미술관을 짓기로 한 것은 그가 존경하는 조선 후기 3대 문장가인 창강 김택영 선생의 글귀, '나라를 잃은 것은 슬픈 일이기는 하나 전통문화와 예술을 잃은 것보다는 덜하다'는 구절 때문이다. 이때 처음 문화란 것에 눈을 떴단다.

미술관을 운영하며 얻은 것을 물었더니 그는 잃은 것부터 말했다. 그는 미술관을 운영하면서 지인을 많이 잃었다는 고백을 했다. "워낙 문화예술단체가 어렵다고 많이 알려지는 바람에 자주 미술관을 찾던 이들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많은 돈을 가지고 시작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손 벌리는 일이 있을까 조심스러웠던 모양이다"고 안타까워했다.

 

 

십수 억 원 들여 폐교 꾸미고 가꿔…인수절차 미뤄져 시에 기증 뜻 차질

 

그의 공식 직함은 삼진미술관 관장이 아니라 (사)전통공예문화협회 이사장이다. 전통공예문화협회에 소속된 기관이 예사랑공예문화원과 한국창작종이문화원, 삼진미술관이다. 협회 소속 회원만 전국에 2만 명이 넘는 전국서 손꼽히는 조직이다. 예사랑공예문화원과 한국창작종이문화원이 있는 안산이 주 활동지역이다. 안산시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안산종이문화축제를 주관하며 1억이 넘는 예산을 배정받아 행사를 치르고 있는 조직이 되었다.

수년 만에 2만 명의 회원이 생긴 배경을 물었더니 "회원 권익보호와 투명한 대회 심사 말고 뭐 있겠어"란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협회로부터 받는 돈이라곤 한 달에 한번 안산출장비 10만 원이 전부다. 혹시나 아는 사람을 통해 청탁이 있을까 마산, 창원지역에는 지부조차 내어주지 않고 있을 정도다.

이제 그는 부업으로 농사까지 손댔다. 올해 초 엄지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하고서도 멈추지 않고 했던 일이 논밭으로 출퇴근하던 그다. 농촌에 살면서 주위 사람들과 할 이야기가 없었던 성 관장의 집에는 직접 키운 고구마, 쌀, 고추가 벌써 4년째 농산물이다.

사회 환원이 그의 인생철학이라면 그의 부인도 묵묵히 성 관장을 뒷바라지하는 일로 자신의 삶을 환원하고 있다.

"사회 환원이 가장 힘들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법인이기 때문에 개인에게 넘기지도 못하고 있다." 자신에게는 남기지도 않는 삶을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까. 현재진행형이다.

 

[경남도민일보] 여경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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