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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은 건물도 유물도 아닌 밝은 눈 가진 전문가 가장 중요”

작성자
김철수
작성일
2010.12.17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1228
내용

박물관은 건물도 유물도 아닌 밝은 눈 가진 전문가 가장 중요” 

한국박물관협회 전보삼 회장 인터뷰


 

 

한국박물관 협회는 우리나라 전체 박물관, 미술관 인들의 모임체인 한국박물관협회는 건전한 박물관, 미술관 활동을 통해 민족 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국내외 박물관, 미술관 상호 간의 유기적 협조 체제 유지 및 제도적 보호 육성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창립됐다.

창립 이래 박물관, 미술관의 건전한 발전을 위한 지원 사업을 펼쳐왔으며, 국내 외 박물관, 미술관과의 자료 교환 및 협조 사업, 연구 발표회, 학술지 및 회지 발간에 관한 사업, 국내 외 특별전 지원 사업, 박물관, 미술관 전문 직원에 대한 교육 및 양성, 등을 통해 우리나라 박물관, 미술관 발전에 선도적 역할을 해왔다. 그 박물관협회의 현재 수장이 바로 전보삼 회장(만해기념관 관장)이다.

 

운명처럼 다가온 ‘님의침묵’

그의 고향은 강원도 강릉, 과거 벼슬아치들이 강릉에 발령받으면 두 번 운다고 했다. 높은 대관령을 넘어 발령지로 향하는 서러움과 답답함에 한 번, 그리고 귀임할 때에는 인심후하고 여러모로 좋은 강릉을 떠나는 섭섭함에 또 한 번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작은 도시지만 예향인 강릉에서 태어난 전 회장은 60년대에 강릉은 작은 도시였다고 회상한다.
“나의 어릴적 세상은 반경4km 정도 되는 세상이었습니다. 하지만 10년 이상 똑같은 사람들과 똑같은 이야기만 하면서 사는 것이 나에게는 지루했죠.”
그런데 이야기는 거기서 시작된다. 시골이지만 예향이던 강릉에는 그런 그가 만날 사람들과 책이 있었다.“새로운 이야기가 좀 필요했어요.
그래서 새로운 이야기 거리를 찾아서 돌아 다니면서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생겼죠. 그러던 중에 강릉에 포교당이라고, 큰 절이 하나 생겼습니다. 그곳에는 객승들의 출입이 잦았습니다. 새로운 이야기거리가 필요했던 저는 그때부터 그곳에서 놀기 시작했어요.
스님들과 이야기 하는게 저에게는 참 즐거웠습니다. 그때가 제가 초등학교 다닐때였는데 뜻은 몰라도 반야심경 같은걸 다 외우고 그랬습니다. 물론 뜻은 몰랐죠. 그래서 객승들에게 많이 물어 보고 그랬습니다. 그런 질문들을 통해 제가 좀 유명해 지게 되었죠.”
그때 그에게 운명 같은 사건이 하나 생긴다.“어린 녀석이 자꾸 귀찮게 질문하고 하니까 어느 스님이‘귀찮으니까 자꾸 질문하지말고 이거나 읽어!’하고 던져 주신 시집이 바로 만해의‘님의 침묵’이라는 시집 이었습니다.”
그때가 중1 시절. 그는 그것을 운명이라고 말한다. 왜 일까? 그래서 만해선생의 시를 읽기 시작했는데 거기에 그가 궁금해 하던 이야기가 모두 들어있더라고 했다.
 그런 그였기에 이미 만해에 대해서는 준전문가였을 터. 고교 시절에 그의 능력은 빛을 드디어 발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고2가 되었는데 국어 교과서에 만해의‘알 수 없어요’라는 시가 나왔어요. 나에게는 큰 반가움이었죠. 그런데 어느 친구가 만해 선생에 대해선 잘 안다며 나를 추천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가서 만해의 일대기를 반 학생들 앞에서 한 시간 수업시간 모두 써가며 이야기 했습니다.
모두 놀랐습니다. 선생님도 놀라고 반학생들도 놀라고 그러면서 제가 자신감을 얻었죠. 그때부터 제가 서울까지 가서 만해선생의 자료를 모으고 했습니다. 출판사에 편지도하고, 연구서적도 사 모으고 하면서 본격적으로 만해연구를 시작한거죠”

 

늘 새로운 이야기에 목 말랐다
그런데 학부 시절 그의 이력은 국문학으로 바로 이어지지 않는다. 왜인가를 물었더니 모두 먹고 사는 문제에 경도돼 있던 시절, 그도 분위기에 휩쓸렸다고 고백한다.
“그때는 주변 분위기가 공대를 많이 갔죠. 저도 그 때문에 공대를 진학했는데 마음에는 이미 만해로 채워져 있었죠. 70년대 후반쯤부터 제가 전공하던 화학공학을 접고 더 전문적으로 만해선생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동국대학교에서‘만해선생의화엄사상’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죠. 그러면서 조그마하게 출판사를 운영했어요.
그때 그렇게 책도내고 한 것이 인연이되어 81년에 심우장(만해한용운고택)으로 옮겨 가며 그곳을 기념관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때 책 팔아 마련한 돈이 좀 있었는데 그것을 털어 마련했죠.“
하지만 운영이 어려웠다. 관람객은 거의 없었다. 교통편도 없었고 오기도 너무 불편했다. 그는 해결책을 찾기 위해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그래서 나온 답이 이것을 오래 보존 하려면 문화재로 지정을 받아야겠다는 것이다.
“그리 생각이 들어서 신청을 했는데 안해주는 겁니다. 집이 너무 허름하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문화재로 지정을 받으려면 건물이 좋아야 합니다. 정신적인 것은 평가하기 힘드니까 외부적인 평가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저는 그래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주변 분들을 설득하고 논쟁도 하면서 결국 85년에‘서울시 사적 제7호’로 선정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민간에서 추천해 문화재로 지정한 첫 사례가 되었죠.”

 

그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그러고 나니까 다시 생각이 드는겁니다.‘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만해선생을 알리고 싶은데 심우장은 접근성이 너무 떨어진다’그런는 생각이 계속 드는겁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조사하고 고심한 끝에 주변에 먹거리도 좀 있고 사람도 많이 모이겠다 싶어서 지금의 남한산성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
그에게 왜 하필 이곳이냐고 물었다. 이는 장소적 궁금증을 푸는 키워드이면서, 그의 박물관론을 살필 수 있는 포인트 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만해선생과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남한산성에 왜 기념관이 있어야 하는냐 문제를 제기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건 잘못된 생각이라고 봅니다. 기념관,박물관은 사람들을 가장 많이 만날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중과의 접근성이 가장 중요하죠. 기념관은 대중과 호흡하기 가장 좋은곳에 있어야 합니다.”
어느 곳에나 있고, 모든 걸 아우르는 백화점식 대형 박물관이 아니더라도, 주제를 갖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박물관이 많아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남한산성 만해기념관을 찾는 사람중에 만해기념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오시는 분들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대부분 남한산성에 놀러 오셨다가 어? 여기에 만해기념관이 있다고 들어오시는 분이 훨씬 많습니다.”
그는 알고 오는 사람들보다 우연히 온사람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그런 운영 정신 탓일까? 지금은 한 해에 한 3만 여명 정도가 만해를 접하고 간다.
“개인이 운영하는 사립박물관 치고는 많이 활성화 돼 있는 편이죠. 그 힘으로 한국박물관협회 회장도 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작은 박물관, 생활 속의 박물관을 지향하는 이가 협회장이 되고 보니, 시급한 선결 과제를 보는 눈도 남다를 것으로 짐작된다. 전 회장에게 이를 물어봤다.
“일단은‘박물관뉴스’발행하는 일을 꾸준히 해야 하겠지요. 관람객들과의 소통의 일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스마트폰시대를 맞아 어플리케이션도 개발할 생각입니다.
소셜미디어도 많이활용하려 하고 있고요. 또 전문인력 양성과 교육에도 힘 쓸 예정입니다. 전국 박물관관장님들 교육이라든지, 학예사나 큐레이터 같은 전문인력 양성에도 특별히 힘을 쏟으려 하고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협회가 그간 일반인과의 접점을 만드는 고리인 각종 어플리케이션, 전시 프로그램, 큐레이터 양성 등에 대해 소홀하다는 비판론은 이미 오래 전부터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잦아들지 않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를 수익사업으로도 보지만, 전 선생은 오히려 이를 꾸짖는다.
“협회가 회비 20만원씩 받으면서 운영하는 낡은 생각을 버리려 합니다. 직접 자체사업도 기획해 수익창출도 하고 그렇게 창출한 수익은 다시 회원들에게 돌아가는 시스템을 만드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투어프로그램을 개발한다거나 교육프로그램, 전시 컨설팅등 찾아보면 생산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이 있어요. 마지막으로 정책위원회도 활성화 시켜서 현장에서 보고 느낀 전문가들이 직접정부에건의도 하고 제도 개선도 꾸준히 해 나가갈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업들을 현실로 옮기기 위해 가장 시급한 문제는 정책개발입니다. 예를 들어, 학예사제도 운영 같은 부분도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아고 있는데 앞으로는 협회가나서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양한, 전문화된 박물관 필요

“필요한 박물관은 많죠. 그런데 제 생각은 큰 박물관 보다는 작고 전문화된 박물관이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야 운영하는 데에도 힘이 덜 들고 박물관도 활성화 될수 있어요.
사실 박물관 하면 방대한 자료도 갖추고 있어야 하고, 모든 것을 백과사전처럼 볼수 있어야 하고, 규모가 커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는 것 같은데 제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크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니죠. 외국 가면 작은 박물관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일본을 예로 들면 1920년대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박물관이 있습니다. 그 박물관 크기가 16평입니다. 그냥 목조로 된 작은 집이지요.
그래도 그 집이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저는 박물관이 자꾸 대형화 하는것에 반대 합니다. 작지만 알차고 내실있는 박물관들이 많이 만들어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정말 중요한 문제가 있는데 바로 박물관을 잘 운영할수 있는 전문가의 보충이 시급합니다.
학예사제도 운영 같은 부분도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아고 있는데 앞으로는 협회가나서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박물관은 건물도 유물도 아닌 밝은 눈을 가진 전문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정부에 박물관,미술관만을 따로 전담하는 부서가 없습니다.
부서도 만들어 져야하죠. 대한민국이 천 개의 박물관시대를 맞이 하면서 담당 부서가 하나 없다는 것은, 21세기 문화컨텐츠 시대에 전문부서가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앞으로 협회에서 강력하게 건의를 할 생각입니다. 좋은 정책도 개발해 꾸준히 건의해 나갈 겁니다. 협회가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안되겠지요. 적극적으로 나서서 뛰고 움직일 것입니다.
또한 박물관을 대부분 일회성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 번 갔다 왔으면 다시갈 필요를 못느끼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박물관은 생활이어야 합니다.
가고 가고 또 가는 것이죠. 그래야 그 유물 안에 있는 깊은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번 보고 어떻게 그 유물 안에 담긴 모든 것들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자꾸 자꾸 봐야 알 수 있지 않겠어요?”
박물관이 생활 속에 들어와 자꾸 자꾸 보여져야 한다고 전 회장은 강조한다. 박물관이야 말로‘온고지신’하는 곳이 될 수 있을지 그의 행보와 향후 협회장 임기의 성과가 주목된다.
“앞으로 다가올 시대는 어떤 시대입니까? 바로‘창의적 인성 교육’의 시대입니다. 바로 그‘창의적 인성 교육’을 할수 있는 곳이 바로 박물관, 미술관 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님의침묵’이란 시를 공부 할 때 지금까지는 그냥 읽고 뜻풀이하고, 형식 외우고 끝냈다면 이제 부터는 시 한 편을 가지고 그 시가 씌여진 시대의 역사를 공부하고 그곳에 담긴 사상을 배우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학문이 서로 연결되는 것 이지요. 바로 그런 통합적이고 창의적인 교육을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박물관,미술관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앞으로 박물관,미술관의 미래는 아주 밝다고 할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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