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내용
사립미술관협회 이메거진
송번수 대전시립미술관 관장
자신의 예술인생이 고스란히 담긴 마가미술관 앞에서 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송번수 관장. 지난 5월14일 대전시립미술관 관장으로 부임했다.
“후회하지 않고, 뒤돌아보지 않고, 한눈팔지 않고 걸어온 예술의 길”
평생 한 길을 가는 일은 쉽지 않다. 그 길이 춥고 배고프고 고달픈 길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여기 평생 한길을 오롯이 걷고 있는 예술가가 있다. 그에게 예술은 삶의 전부다. 예술에 바친 일생을 또 다시 예술의 토대를 튼튼히 하는 일에 헌납하게 됐다. 그가 바로 얼마 전 대전시립미술관 관장으로 부임한 송번수 관장(66)이다. 사립미술관인 마가미술관 관장이기도 한 송 관장은 대전과 용인을 오가며 우리 예술의 르네상스를 위해 힘쓰느라 누구보다도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5월의 마지막 날, 경기도 용인에 있는 마가미술관에서 송 관장을 만났다.
마가미술관은 송 관장이 개관해 운영하는 섬유ㆍ판화전문 사립미술관이다. 애초 자신의 작업실이 있던 자리에 2002년부터 미술관을 조성했다. 우거진 수풀이 바람에 살랑대고 여름의 담쟁이가 힘차게 생의 담벼락을 올라가는 곳. 미술관 앞 너른 마당의 잔디는 파릇파릇 싱싱했다. 신선놀음이 따로 없을 것만 같은 분위기다.
“신선놀음은 무슨 신선놀음. 머슴이 따로 없어요. 어제도 하루 종일 잔디 깎느라고 힘들었는데요. 마누라랑 나는 완전 머슴이야.”
사립미술관을 운영하느라 안 그래도 무거운 어깨가 최근 들어서는 더욱 무거워졌다. 지난 5월14일자로 대전시립미술관을 이끌 새로운 수장으로 임명됐기 때문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은 대전에서, 토ㆍ일요일은 용인에서 생활하고 있다. 평생 작가의 길을 걸어온 터라 그 밖의 일에는 눈을 돌리고 싶지 않았지만 고향(대전)의 일이라 용기를 냈다는 그다.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송 관장은 대전에서 초ㆍ중ㆍ고교를 다녔다. 그 후 1961년에 홍익대학교에 진학하면서 대전을 떠났다. 근 반세기 만에 고향에 내려간 셈이다. 49년 만에 내려간 고향은 과거 그가 떠나왔던 고향과 판이하게 달랐다.
“초중고를 다닐 때 대전에 문화시설이라고는 대전문화원이 전부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건평 8260여㎡(2500평)의 대전시립미술관이 있고, 그 옆에 예술의전당이 있고. 또 작가들도 1000명 정도가 열심히 작업하고 있고. 제 초중고시절보다는 예술과 미술의 기반이 탄탄해졌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시립미술관장이라는 직책에 더욱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어요.”
취임해 내부를 들여다보니 할 일들이 많다. 특히 낡은 전시장 내부를 손보는 일이 시급하다는 송 관장은 전시 환경을 현대적인 감각에 맞게 적절하게 고칠 계획을 세웠다. 그런 작업들을 통해 국제 전시도 너끈히 유치할 수 있는 국제 수준의 시립미술관을 만들어낼 각오다. 그가 롤 모델로 생각하는 미술관은 스페인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다.
“미술관의 역할이 시민에게 문화 향유권을 제공하는 게 가장 크지만 저는 그것보다 시민들의 내면에 숨어있는 창의력을 개발시키는 게 더욱 중요하다고 봐요. 그래서 잠재의식 이면에 숨어있는 창의력을 재생시키고 고취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과 전시메뉴를 개발하는데 힘쓰려고 합니다. 창의력이 국가경쟁력의 제일요소 아니겠어요.”
그러나 난생 처음 해보는 행정업무가 쉽지만은 않다. 게다가 행정 업무를 보노라면 작업실에서 작업하는 시간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그렇다해도 고향에 너무 늦지 않게 내려오게 돼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대전의 전시 환경을 정비하는데 힘을 보탤 수 있어 다행이지요.”
서울과 용인을 바쁘게 오가다 보니 작업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와도 작업에 손을 댈 시간은 조금도 생기지 않는다. 작업보다도 마가미술관 관리가 시급하다. 아내가 돌보고 있지만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다. 한 주를 대전에서 보내고 오면 마당의 잔디는 한 뼘씩 자라있고, 잡풀들이 저마다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팔 걷어 부치고 미술관을 손보다 보면 휴일이 훌쩍 지나간다.
사립미술관을 운영한다는 건 결코 녹록한 일이 아니다. 아니 어쩌면 사명감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사립미술관 운영은 소모전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대학교(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공예과 교수)에서 정년퇴임한 뒤에는 연금으로 미술관을 운영해왔어요. 그런데 연금만으로 미술관을 운영한다는 게 사실 불가능해요. 입장료만으로는 운영이 안 되니까 결국은 내 작품을 화랑이나 경매 등을 통해 매매해서 미술관 운영 자금으로 쓰고 그러죠. 자금이 없다보니 직원을 쓸 수도 없어요. 제가 명함만 관장이지 사실은 관리인이에요. 화장실 청소까지 다 하니까. 사명감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인데 내가 죽을 때까지는 최선을 다해 운영할 생각이에요.”
마가미술관은 널찍한 작업실과 태피스트리 및 판화작품 상설전시장 등으로 나뉘어 있다. ‘그날 이후’, ‘논리와 가능성’ 등 송 관장의 대표적인 태피스트리 작품이 눈길을 끈다.
태피스트리는 그가 프랑스에서 유학할 때 현지에서 접한 뒤 강렬한 영감을 받아 적극적으로 배워온 예술 장르다. 베틀을 짜듯 씨실과 날실을 한 올 한 올 엮어 그림을 만드는 방식이다. 기법을 배우기도 어렵거니와 시간도 무척 오래 걸리는 작업이다. 최소 6개월은 기본이다. 꼬박 3년이 걸려 완성한 작품도 있다.
그의 태피스트리 작품은 빛과 그림자, 무채색과 유채색, 선과 면 등 조형적인 면에 있어서 물감을 사용한 것보다 자연스러우면서 강렬하다. 작품 안에는 그가 평생 질문해온 철학적 명제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살아온 시대가 그래서 그런지 저는 절망과 가능성이라고 하는 주제를 가지고 작업을 해왔어요. 절망과 가능성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양쪽의 진폭 속에서 작업했다고나 할까요. 이 주제는 제게 영원한 진행형이에요. 제가 생애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균형입니다. 밸런스. 그러나 나 역시 균형 감각을 가지고 살지 못했다고도 할 수 있어요. 절망과 가능성 사이를 오가는 삶 속에서 오늘에 이르렀어요. 지금도 그렇고 무덤까지 계속 될 것 같은데, 그게 아티스트의 운명이겠지요.”
그렇다고 자신이 걸어온 예술의 인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가장 보람 있는 일이었다고 자부한다.
“예술가의 길이라는 것이 무척 보람이 있습니다. 과정도 그렇고 결과도 그래요. 결과가 없이 중간에 끝난다 하더라도 상당히 보람 있는 인생이 바로 예술가라고 생각해요. 고흐도, 베토벤도, 그 고약한 성질 때문에 일찍 죽었지만 보람 있잖아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가보니까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를 먹여 살립디다. 한 예술가가 도시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요. 이 마가미술관도 내 인생을 아우르는 곳이 됐으면 좋겠어요.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뭔가 상징이 되고 싶은 바람이 있어요. 앞으로 자식들이 잘 운영해 줄지는 미지수지만.(웃음)”
가난한 대학시절 서대문의 한 아파트에서 가정교사를 하던 때 그 집의 가정부를 도와 양동이에 물을 받으러 다녔던 어려웠던 시절을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만든 조각. 마가미술관의 상징으로 걸어두었다.
유혹이 많은 시대에 용기 있게 예술의 길을 선택한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다. 예술가의 기본자세에 대한 경구다.
“은사님이신 최종태 선생님이 말씀해주신 게 있어요. 예술가들은 시작했으면 후회하지 말라 , 뒤돌아보지 말라, 한눈팔지 말라고 하셨어요. 생각해보면 저는 이 세 가지를 다 지키면서 여기까지 왔어요.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유혹과 좌절을 겪었겠어요. 이름도 날리고 싶고 돈도 많이 벌고 싶고 그런 맘이 왜 안 들었겠어요. 그러나 만약 그걸 얻기 위해 한눈팔고 그랬다면 결국 보람 없는 인생이 됐겠지요.”
송 관장에게, 앞으로 남은 길도 꾸준히 예술에 복무하는 길이 될 것이다. ‘운명’이나 ‘생의 심포니’ 등이 지금 계획하고 있는 작업의 방향이다.
인터뷰 말미에 자신을 예술가로 살도록 내조해준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슬며시 드러낸다.
“아내의 고마움은 한 마디 감사의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어요. 내 인생의 전부지요. 아내는 모든 것을 참아주고 모든 것을 용서해주는, 사랑의 표본이었어요. 몇 년 전에 아내의 거친 손을 보면서 ‘아내의 손’이라는 작품을 했는데 아내에 대한 고마움은 마음속에만 있어요.”
용인|글ㆍ사진=김효원 객원기자(프리랜서, 본명 김영숙)
<송번수 프로필>
1943년 충남 공주 출생. 대전상고, 홍익대 미술대학 및 동 대학원 졸업. 파리국립미술학교 수학. 홍익대 미술대학 공예과 교수로 재직 후 2008년 정년퇴직. 2002년부터 마가미술관 운영. 1970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대상전 우수상을 시작으로 2001년 헝가리 문화유산부 주최 헝가리 개국 1000년 기념 국제 태피스트리전시회 대상 등 다양한 상을 수상. 2009년 5월 현재 대전시립미술관 관장으로 재직 중.
송번수 대전시립미술관 관장
자신의 예술인생이 고스란히 담긴 마가미술관 앞에서 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송번수 관장. 지난 5월14일 대전시립미술관 관장으로 부임했다.
“후회하지 않고, 뒤돌아보지 않고, 한눈팔지 않고 걸어온 예술의 길”
평생 한 길을 가는 일은 쉽지 않다. 그 길이 춥고 배고프고 고달픈 길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여기 평생 한길을 오롯이 걷고 있는 예술가가 있다. 그에게 예술은 삶의 전부다. 예술에 바친 일생을 또 다시 예술의 토대를 튼튼히 하는 일에 헌납하게 됐다. 그가 바로 얼마 전 대전시립미술관 관장으로 부임한 송번수 관장(66)이다. 사립미술관인 마가미술관 관장이기도 한 송 관장은 대전과 용인을 오가며 우리 예술의 르네상스를 위해 힘쓰느라 누구보다도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5월의 마지막 날, 경기도 용인에 있는 마가미술관에서 송 관장을 만났다.
마가미술관은 송 관장이 개관해 운영하는 섬유ㆍ판화전문 사립미술관이다. 애초 자신의 작업실이 있던 자리에 2002년부터 미술관을 조성했다. 우거진 수풀이 바람에 살랑대고 여름의 담쟁이가 힘차게 생의 담벼락을 올라가는 곳. 미술관 앞 너른 마당의 잔디는 파릇파릇 싱싱했다. 신선놀음이 따로 없을 것만 같은 분위기다.
“신선놀음은 무슨 신선놀음. 머슴이 따로 없어요. 어제도 하루 종일 잔디 깎느라고 힘들었는데요. 마누라랑 나는 완전 머슴이야.”
사립미술관을 운영하느라 안 그래도 무거운 어깨가 최근 들어서는 더욱 무거워졌다. 지난 5월14일자로 대전시립미술관을 이끌 새로운 수장으로 임명됐기 때문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은 대전에서, 토ㆍ일요일은 용인에서 생활하고 있다. 평생 작가의 길을 걸어온 터라 그 밖의 일에는 눈을 돌리고 싶지 않았지만 고향(대전)의 일이라 용기를 냈다는 그다.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송 관장은 대전에서 초ㆍ중ㆍ고교를 다녔다. 그 후 1961년에 홍익대학교에 진학하면서 대전을 떠났다. 근 반세기 만에 고향에 내려간 셈이다. 49년 만에 내려간 고향은 과거 그가 떠나왔던 고향과 판이하게 달랐다.
“초중고를 다닐 때 대전에 문화시설이라고는 대전문화원이 전부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건평 8260여㎡(2500평)의 대전시립미술관이 있고, 그 옆에 예술의전당이 있고. 또 작가들도 1000명 정도가 열심히 작업하고 있고. 제 초중고시절보다는 예술과 미술의 기반이 탄탄해졌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시립미술관장이라는 직책에 더욱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어요.”
취임해 내부를 들여다보니 할 일들이 많다. 특히 낡은 전시장 내부를 손보는 일이 시급하다는 송 관장은 전시 환경을 현대적인 감각에 맞게 적절하게 고칠 계획을 세웠다. 그런 작업들을 통해 국제 전시도 너끈히 유치할 수 있는 국제 수준의 시립미술관을 만들어낼 각오다. 그가 롤 모델로 생각하는 미술관은 스페인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다.
“미술관의 역할이 시민에게 문화 향유권을 제공하는 게 가장 크지만 저는 그것보다 시민들의 내면에 숨어있는 창의력을 개발시키는 게 더욱 중요하다고 봐요. 그래서 잠재의식 이면에 숨어있는 창의력을 재생시키고 고취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과 전시메뉴를 개발하는데 힘쓰려고 합니다. 창의력이 국가경쟁력의 제일요소 아니겠어요.”
그러나 난생 처음 해보는 행정업무가 쉽지만은 않다. 게다가 행정 업무를 보노라면 작업실에서 작업하는 시간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그렇다해도 고향에 너무 늦지 않게 내려오게 돼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대전의 전시 환경을 정비하는데 힘을 보탤 수 있어 다행이지요.”
서울과 용인을 바쁘게 오가다 보니 작업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와도 작업에 손을 댈 시간은 조금도 생기지 않는다. 작업보다도 마가미술관 관리가 시급하다. 아내가 돌보고 있지만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다. 한 주를 대전에서 보내고 오면 마당의 잔디는 한 뼘씩 자라있고, 잡풀들이 저마다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팔 걷어 부치고 미술관을 손보다 보면 휴일이 훌쩍 지나간다.
사립미술관을 운영한다는 건 결코 녹록한 일이 아니다. 아니 어쩌면 사명감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사립미술관 운영은 소모전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대학교(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공예과 교수)에서 정년퇴임한 뒤에는 연금으로 미술관을 운영해왔어요. 그런데 연금만으로 미술관을 운영한다는 게 사실 불가능해요. 입장료만으로는 운영이 안 되니까 결국은 내 작품을 화랑이나 경매 등을 통해 매매해서 미술관 운영 자금으로 쓰고 그러죠. 자금이 없다보니 직원을 쓸 수도 없어요. 제가 명함만 관장이지 사실은 관리인이에요. 화장실 청소까지 다 하니까. 사명감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인데 내가 죽을 때까지는 최선을 다해 운영할 생각이에요.”
마가미술관은 널찍한 작업실과 태피스트리 및 판화작품 상설전시장 등으로 나뉘어 있다. ‘그날 이후’, ‘논리와 가능성’ 등 송 관장의 대표적인 태피스트리 작품이 눈길을 끈다.
태피스트리는 그가 프랑스에서 유학할 때 현지에서 접한 뒤 강렬한 영감을 받아 적극적으로 배워온 예술 장르다. 베틀을 짜듯 씨실과 날실을 한 올 한 올 엮어 그림을 만드는 방식이다. 기법을 배우기도 어렵거니와 시간도 무척 오래 걸리는 작업이다. 최소 6개월은 기본이다. 꼬박 3년이 걸려 완성한 작품도 있다.
그의 태피스트리 작품은 빛과 그림자, 무채색과 유채색, 선과 면 등 조형적인 면에 있어서 물감을 사용한 것보다 자연스러우면서 강렬하다. 작품 안에는 그가 평생 질문해온 철학적 명제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살아온 시대가 그래서 그런지 저는 절망과 가능성이라고 하는 주제를 가지고 작업을 해왔어요. 절망과 가능성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양쪽의 진폭 속에서 작업했다고나 할까요. 이 주제는 제게 영원한 진행형이에요. 제가 생애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균형입니다. 밸런스. 그러나 나 역시 균형 감각을 가지고 살지 못했다고도 할 수 있어요. 절망과 가능성 사이를 오가는 삶 속에서 오늘에 이르렀어요. 지금도 그렇고 무덤까지 계속 될 것 같은데, 그게 아티스트의 운명이겠지요.”
그렇다고 자신이 걸어온 예술의 인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가장 보람 있는 일이었다고 자부한다.
“예술가의 길이라는 것이 무척 보람이 있습니다. 과정도 그렇고 결과도 그래요. 결과가 없이 중간에 끝난다 하더라도 상당히 보람 있는 인생이 바로 예술가라고 생각해요. 고흐도, 베토벤도, 그 고약한 성질 때문에 일찍 죽었지만 보람 있잖아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가보니까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를 먹여 살립디다. 한 예술가가 도시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요. 이 마가미술관도 내 인생을 아우르는 곳이 됐으면 좋겠어요.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뭔가 상징이 되고 싶은 바람이 있어요. 앞으로 자식들이 잘 운영해 줄지는 미지수지만.(웃음)”
가난한 대학시절 서대문의 한 아파트에서 가정교사를 하던 때 그 집의 가정부를 도와 양동이에 물을 받으러 다녔던 어려웠던 시절을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만든 조각. 마가미술관의 상징으로 걸어두었다.
유혹이 많은 시대에 용기 있게 예술의 길을 선택한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다. 예술가의 기본자세에 대한 경구다.
“은사님이신 최종태 선생님이 말씀해주신 게 있어요. 예술가들은 시작했으면 후회하지 말라 , 뒤돌아보지 말라, 한눈팔지 말라고 하셨어요. 생각해보면 저는 이 세 가지를 다 지키면서 여기까지 왔어요.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유혹과 좌절을 겪었겠어요. 이름도 날리고 싶고 돈도 많이 벌고 싶고 그런 맘이 왜 안 들었겠어요. 그러나 만약 그걸 얻기 위해 한눈팔고 그랬다면 결국 보람 없는 인생이 됐겠지요.”
송 관장에게, 앞으로 남은 길도 꾸준히 예술에 복무하는 길이 될 것이다. ‘운명’이나 ‘생의 심포니’ 등이 지금 계획하고 있는 작업의 방향이다.
인터뷰 말미에 자신을 예술가로 살도록 내조해준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슬며시 드러낸다.
“아내의 고마움은 한 마디 감사의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어요. 내 인생의 전부지요. 아내는 모든 것을 참아주고 모든 것을 용서해주는, 사랑의 표본이었어요. 몇 년 전에 아내의 거친 손을 보면서 ‘아내의 손’이라는 작품을 했는데 아내에 대한 고마움은 마음속에만 있어요.”
용인|글ㆍ사진=김효원 객원기자(프리랜서, 본명 김영숙)
<송번수 프로필>
1943년 충남 공주 출생. 대전상고, 홍익대 미술대학 및 동 대학원 졸업. 파리국립미술학교 수학. 홍익대 미술대학 공예과 교수로 재직 후 2008년 정년퇴직. 2002년부터 마가미술관 운영. 1970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대상전 우수상을 시작으로 2001년 헝가리 문화유산부 주최 헝가리 개국 1000년 기념 국제 태피스트리전시회 대상 등 다양한 상을 수상. 2009년 5월 현재 대전시립미술관 관장으로 재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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